2009년 11월 30일, 이달 마지막 하루, 월요일, 대강 맑으나 하늘은 뿌연 날씨
오후에 엄마한테 들러 지리산으로 떠날 차비를 하고서 집을 나섰다. 한국투자신탁에 들러서 해마다 우리 침실을 장식하는 야생화 달력 두 권을 얻었다. 그런데 그 은행 홀에 앉은 사람들은 전광판을 바라보면서 야성적인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디서 본 눈들이던라? 아하, 태백 탄광촌에 만들었다는 카지노에 구경갔다가 본 얼둘들이고 눈빛들이다. 돈독이 오른 눈이랄까?
11시에 한신대학교 수유리 캠퍼스, 내 모교를 찾아갔다. 새로 지은 현대식 교회의 헌당식을 계기로 강영성 새 대학원장 취임식을 한다면서 여동문회로부터 "증경[전임] 회장"들을 소집하는 전화를 여러번 받은 터였다. 나도 90년말 4년간 회장을 했으므로 빠지기 어려웠다. (더구나 새 대학원장은 내가 총동문회 부회장을 할 때에 총동문회 회장을 함께 하던 강만원 목사의 아들이다. 강만원 목사는 기장의 총회장도 지냈다.)
보스코도 모처럼 내 모교방문에 동행하였다. "운동화 바닥에 붙은 껌"으로서 간 게 아니라 한신대학교 새 총장으로 취임한 채수일 목사가 보스코를 엄청 좋아하고 내가 보스코의 종교행사에 함께 하듯이 그도 나의 종교행사에 함께 하는 것이 도리였기 때문이다. 많은 선후배 목사들이 자기네 선후배인 나와, "해방신학자"로 통하고 (실은 번역가인데) 가톨릭에서 진보적인 글을 써서 알려진 보스코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내 집에 온 것이고 보스코는 "처가대학"에 온 셈이다.
새로 지은 "장공(김재준 목사) 기념관" 앞에서
학교 건물들이 크게 달라져서 생경했다. 옛날의 가난한 체플실이며 강의실 몇 개뿐이었던 본관, 굽어진 소나무들, 숲쪽의 기숙사, 그 넓은 잔디밭에 우리 여학생들이 앉아서 희희낙락하고 있으면 나무 뒤에서 여학생들 훔쳐보던 남학생들, "야, 요년들아! 가만 있지 말고 잔디밭에 풀좀 뽑아라!"고 호령하시던 안병무박사님의 웃음기 가득하던 얼굴... 우리 청춘시절의 장면들이 아득하게 어른거리는데 "옛날에 금잔디 동산"과 야트막한 집들은 흔적도 없고 그 추억의 자리에 웅장하고 번쩍거리는 새 건물들이 나를 한참이나 낯설게 하였다.
나는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것을 내 생애의 가장 큰 행운 중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담임선생님 말씀대로 이화대학을 갔더라면 나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얼마나 지금에서 멀어졌을까? 나를 주의 깊게 관찰하시던 교목 차원태 목사님이 "네 일생을 생각하거든 거기 가지 말고 한국신학대학을 가거라."고 권하셨다. 당신은 감리교 목사님이면서도 감리교 신자이던 내게 감리교 신학대학 대신에 기독교 장로회 신학교를 내게 추천하신 것이다. 그리고 과연 내 인생은 크게 달라졌다. 나를 사람되게 가르치신 김정준,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이우정, 박봉랑, 전경연, 안희국 교수님들의 자취가 그립다.
새 교회에서의 헌당예배, 대학원장 취임, 10억 들여 설치한 파이프 오르갠 증정식(경동교회 어느 집사가 희사했고 세계 최고의 수준의 것이란다.)에 이어서 잘 차린 뷔페 점심이 제공되었다. 점심후 보스코는 한신대 종교학과 김항섭 교수(그의 남미 유학을 보스코가 주선하였다.)에게 맡겨 환담을 나누게 하고, 나는 여동문회 회의장에 들어갔다. 여동문회의 문제점과 진로를 토론하다보니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갔다. 학교에서 내려와 운동장에 주차된 차에 가보니 보스코는 착한 아이처럼 말없이 쉬고 있었다.
강성영 목사의 대학원장 취임사 보스코와 한신대 김항섭 교수
지리산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홈플러스와 이마트를 돌면서 손자 시아에게 보낼 "토마스기차 식판"을 샀고 아이에게 보낼 수저와 젓가락도 샀다. 손자가 원하면 뭐든지 다 해 줄 태세가 선 것이 할머니 할아버지다. 엄마가 이것저것 얘기하신다면 "아니, 엄마, 아직도 뭐가 그렇게 갖고 싶은 게 많수?"하고 퉁명스럽게 핀잔할 텐데 말이다.
오후도 늦은 시간이어서 지리산으로 그냥 내려갈까 해서 "유무상통"(양로원)에 계시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왜 아직 안 오니?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바쁠 테니까 오지 말라고 엄마가 말했쟎아?" "아니, 그랬다고 진짜 안 오면 어떡하니? 네 전화만 기다렸는데."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짠하게 아려 온다. "나도 내 아이들을 그토록 보고 싶은데. 자식이 나 있는 곳을 지나가면서 그냥 지나친다면 한없이 섭섭할 텐데... 그렇게 마냥 기다리는 게 부몬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용인으로 냅다 달렸다. 정말 사랑은 내리사랑이다. 부모에게 돌아가는 치사랑은 얼마나 힘들여야 겨우 생색이나마 내게 되던가?
보스코는 손님방에서 혼자 자라고 보내고서(유무상통의 방상복 신부님은 보스코와 내가 오면 언제나 친절을 다하여 재워주고 먹여주고 환대하신다.) 나는 엄마 곁에서 엄마랑 함께 잤다. 밤늦도록 온갖 얘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엄마는 그 앙상한 손으로 내 얼굴을 자꾸 쓰다듬고, 침과 부황을 맞은 내 어깨와 다리를 쓰다듬으신다. 엄마는 엄마다. 밤이 깊어서도 새근새근 숨소리도 가느다란 엄마의 숨소리에 잠이 안 온다. 88세의 엄마. 앞으로 얼마나 더 엄마의 저 숨소리를 듣고 엄마의 앙상한 저 손길을 내 두 뺨에 느낄 수 있을까? (하기야 우리 외할머니는 3년전 106세에 돌아가셨다.) 문득 "내 새끼들"이 그립다. 그러니 엄마도 엄마의 새끼들이 그토록 그리웠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