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9일, 일요일 하루 종일 실비가 내림 

 

우이성당엘 가면 수십년을 이웃해온 반가운 얼굴들이 많다. (우리가 우이동에 이사온 것이 32년전이고 수유동성당에서 우이성당으로 분가한 것은 얼마 안 된다.) 성당으로 떠나면서는 비가 후둑거렸지만 성당에서 친숙한 얼굴들을 보면서 마음은 "맑음"이다.  

                                                                                                                                                             혜연이네 아이들

DSC09323.JPG 혜선엄마를 만났다. 유치원 다닐 적에 "나는 담에 커서 빵기오빠에게 시집간다."고 공식으로 선언했던 혜연이는 딴 남자한테 시집가서 벌써 애가 둘인데 오랜 친정살이를 청산하고 남편 따라 수원으로 이사갔단다. 혜선엄마는 손자들이 떠나서 시원하기도 하지만 곰살거리던 손녀들이 눈에 선하단다. 우리 친구들의 얼굴에 자잘한 주름들이 우리가 할머니가 되었음을 추인한다. (심정적으로는 인정들을 안 하니까. 할머니가 다 되어서도 마음이야 "여고시절"이라는데 그 심정 십분 이해되고 남는다.)  

 

미사 후에는 솔밭옆 춘천막국수 집에 가서 어제 보스코가 손님대접을 하면서 외상으로 긋고온 저녁값을 계산했다. 술값이 아니어서 다행이긴 한데 보스코가 이젠 지갑도 안 들고 나가는 건망증이 발생하곤 한다. 지갑 속에 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나가는 것은 예사였고.... 그래서 내가 수시로 지갑을 검사한다.

 

그 다음 채선당에서 두 분 수녀님과 함께 점심을 들었다. 점심후 보스코는 집으로 올라가고 나는 수녀님들과 함께 <옹기박물관> 구경을 하였다. 자그마한 박물관이지만 우이동에 이름난 박물관이다. 박물관장 이영자씨를 2년여만에 만났다. 아직도 맑은 표정에 소녀 같다. 그 동안 긴 얘기를 할 틈이 없었는데 비도 오고 수녀님들도 계시고 여자들끼리만 있어서선지 차를 대접하면서 속내도 털어놓았다. 

 

갑자기 남편을 여의고 거의 8년간 죽은 남편을 가슴에 품고 살아오다가 2000년을 지나면서야 겨우 자기를 되찾을 수 있었단다. 얼마전 새벽녁 잘못 결려온 남자의 목소리가 하루종일 귀에 맴돌면서 마음을 설레게 하더란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아직도 여성이 살아있다는 게 신기하더란다.

 

나는 보스코더러 내가 먼저 가면 무덤 잔디 마르라고 부채질도 할 것 없이 당장 재혼하라고, 당신은 여자의 도움 없이 도무지 살 수 없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느님 나라에 가서도 당신이 행복해야만 나도 행복할 거라고 말하곤 했다. 보스코 역시 자기가 없으면 내 앞에 남자들이 줄을 설 터니 제일 좋은 남자 골라서 행복하게 살라고 한다. 둘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다가 같은 날 하느님 나라에 들기를 늘 기도드리고 있고 두 아들들도 우리를  위해 같은 기도를 올리고 있다. " 엄마 아빠 둘이서 너무 잘 놀기 때문에" 하나 없이는 하나가 못 산다는 아이들 평이다. 그러나 "살고 죽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묻지 않고 당신이 알아서 하신다."는 보스코의 설명도 없지 않다.

 

종이공예가  이순재씨의 작품전 "나는 무궁화입니다"(운현궁)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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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에는 운현궁에서 종이공예가로 독보적 자리를 갖고 있는 이순재씨가 개최하는 "나는 무궁화입니다" 전시회를  보러 갔다(나의 9월 9~10일, 9월 29일자 일기 참조). 이문자 선생님도 와 있었다. 순수하고 싱그러운 이순재씨를 닮은 무궁화가 구석구석 가득히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올라 있었다. 5시 반에 문을 닫고나서 인사동에 있는 "여자만"이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당 이름이 희한하다. 남자는 오면 안 된다는 말인가 했는데  식탁마다 여자 하나에 남자 하나는 꼭 끼어들 앉아 있었다. 이름을 바꿔야 할까?)

 

찻집 "귀천"에서                                 "이상한 식구, 수상한 가족"을 성토하는 이문자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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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후에는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 하는 찻집<귀천>에 앉아서 밤늦도록 수다를 떨었다. 홀몸인 이순재씨를 쫓아다닌다는 철학관 총각 얘기며, 이문자 선생의 근황에 이어서 나한테는 어떻게 언제나처럼 똑같이 그렇게 사느냐는 성토가 돌아왔다("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구요?"). 이문자 선생의 평이 재밌었다. "어떤 일에나,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끈질기게, 끝까지 해내는 여자가 왜 성염 선생한테만 올인하는지 모르겠다.  아깝다. 너무 아깝다. 남자 퇴직하면 젖은 낙엽인데 뭐가 그리 좋다고 지금도 우리를 닭살돋게 하는가? 이상한 여자다." "빵기와 빵고를 보더라도 둘 다 부모가 그토록 버려두었는데 망가지지 않았으니 걔들도 이상한 애들이다. 그 식구들은 다 이상하다. 수상한 가족이다. 연구대상이다."  우리가 연구대상인지는 몰라도 밤늦게 우이동에 돌아오니 "운동화 바닥에 붙은 껌"은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활짝 웃으며 아내를 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