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9일 목요일, 날씨 알맞게 맑음

 

새벽 6시경에 일어나 다용도실로 내려가 마늘과 생강을 다져서 물김치에 넣고 대파, 청각, 배, 사과, 모과, 매실청, 땡초 이 모든 것을 집어 넣고서 산죽닢으로 눌러 놓으니 동치미 담그기는 끝났다. 맛있게 익어만 다오.

 

8시 반에 송문교 앞에 집합하니 일행은 열두 명이었다. 자동차 3대로 남해 금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최근 산행 인원 중에 "멧돼지" 숫자가 제일 많은 날이다. 우리 부부, 대장 부부, 스테파노씨 부부, 이기자 부부, 용식씨 부부, 오라버니와 나여사 등 12명. 내 차에는 보스코, 오라버니, 체칠리아씨가 탔다. 두 사람의 진솔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대화는 늘 우리를 즐겁게 한다.

 

11시에 금산에 도착하여(차를 끝까지 몰고 올라갔다. 다리 아픈 사람들을 생각해서.) 정상에 오르니 11시 40분! 글라라씨에게는 생애 세번째로 정상을 정복한 산이란다. 이 산의 높이 해발 681미터(와!!!!). 나머지 두 산은 본인에게 물어봐야지...

 

생애 세번째로 산꼭대기를 정복하고 환호하는 전여사와 이기자의 흐믓한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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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데 초등학생 남자애들 몇이 바위위에 도시락을 까놓던 참이었다.

"야, 우리도 배고프니 한 알씩 다오."

"아줌마, 우리도 배고파 부족해요."

"얘들아, 북한의 굶주린 동포와  아프리카 흑인들도 도와주는데 바로 곁에 있는 동포한테 김밥 한 알씩 내놓으면 안 되니?"

"어씨." 하면서도 한 알씩은 내놓았다. 나는 전부에게 한 알씩 구걸해서 보스코와 나눠 먹었다. 맛이 얼마나 고소한지....

 

남해 금산 상봉에서                                               "얘들아, 김밥 좀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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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봉을 지나 보리암에 들르고 다시 주차장에 내려오니 낮 12시 반. 창선대교까지 가서 그곳 수협식당(뱃모양으로 지었다.)에 들어가려다 내 주장으로 옆에 있는 다른 식당으로 들어갔다. <단학>이라는 횟집이었다. 그 전에 친구랑 들렸을 적에 맛이 좋았다는 기억이 남아서였다. 회를 실컷 먹고서 삼천포 어시장에 들렀다.

 

여자들은 시장에서 펄쩍펄쩍 뛰는 생선만 봐도 가슴이 설렌다. 각자가 다른 생선을 샀는데 하나같이 "남편이 좋아하는" 생선을 고르고 있었다. 여자의 인생은, 일단 결혼하고 나면, 모든 것이 "남편과 아이들을 향하는(towards)" 인생이 되는 것 같다. 아름다운 일이다. 나도 보스코가 좋아하는 낙지를 샀다. 그는 낙지볶음을 참 좋아한다.

 

우리 산골에 언제나 싱싱하고 질 좋은 생선을 직송으로 보내주는 "일성상회"에 들렀다. 그는 우리의 다정한 김용민 신부님의 사촌인 "수야네식당"의 친구여서 우리에게 친절하기 이를 데 없다. 지리산 문정에서 손님에게 생선대접을 하거나 잔치를 할 때마다 "일성상회"(055-832-8742)에 전화하면 아침에 생선을 사서 회쳐서는 얼음에 재서 직행버스로 보내준다. 우리는 오후에 함양읍에 가서 화물을 받아오는데 얼음 속에 싱싱한 회와 푸짐한 매운탕거리가 들어 있곤 했다. 주인은 나를 반기면서 도미랑 여러가지 생선을 싸주었다.

 

     "단학 횟집"에서 반가운 식탁을 앞에 놓고     "일성상회"의 친절한 여주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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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체칠리아씨가 간간이 들려준 남편의 "전력"(?)도 아릿하였다. 잘나가던 직장의 중책을 떠나서 사업을 벌인 이야기, 그 사업이 안 되어 고초를 겪던 이야기(그래서 머리 숱이 적어졌단다), 가정경제를 분담하는 이야기(이기자 표현으로는 "독립채산제")를 아내의 깊은 애정과 시선을 갖고서 담담하면서도 익살스럽게 얘기해 주었다. 결론은 "항상 나를 자유롭게 해 주고, 교편생활을 하면서 무슨 모임이나 출장이 있어도 터치하지 않으며(보스코 같은 와이프보이로서는 어림도 없다. 내가 하루 이틀쯤 자리를 비우면 진이엄마나 그를 지켜본 모든 여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내게 하는 말, "교수님은 혼자서 안 되겠어요. 너무 풀이 없어요.") 가족의 많은 시련이 와도 대범하게 넘어가는 스테파노씨"였다!

 

오라버니도 사업에 실패하고서 술과 고기로 소일하던 시기, 그러다 몸까지 좋지 않아서 낮에는 집안일 해놓고 아내가 퇴근할 시간쯤이면 집을 나가 저녁 늦게 돌아오던 마음고생, 산에 가다 도서관 가다 하면서 일주일을 보내야 하는 고초 등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제일 괴로운 일은 월요일이면 도서관이 닫힌다는 것이었단다. 


그의 결론은 "일 없이 지내는 게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다."였다. 보스코가 라틴어 속담 "노동 않는 것이 가장 힘든 노동(non laborare est laborare)"이라는 말을 보탰다. 그리고 시간이 남아서 괴롭고 시간을 죽여야 하는 고통을 이곳 문정에 와서 일거에 해소해서 즐겁단다. 스테파노씨 부부나 오라버니나 김교수나 우리의 "멧돼지들"의 지난 날에 새겨진 깊은 아픔들과 고통이 가슴에 와 닿고 그것을 이겨내고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는 모습들에 박수를 보낸다. 어머니 지리산이 저 모든 아픔을 안아주고 다독여주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