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9일, 월요일. 날씨는 하루 종일 흐림. 덕장에 도움 안 되게 따뜻함.

 

감을 깎기에는 날씨가 너무 덥고 습기가 높다. 덕장에 널어놓은 꽂감 일부에는 벌써 곰팡이가 핀다고 토마스가 걱정이다. 소주원액 99% 알콜을 스프레이로 뿌려보겠단다. 스테파노씨네 줄줄 흐르던 감은 더 걱정이다. 다른 사람들도 걱정이 많겠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야 따뜻한 겨울(소위 '바깥 인심')이 반갑겠지만 곶감은 아주 추워야 덕장에서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당도가 올라간단다.

 

어제 왔던 윗동네 아줌마는 공공근로 나간다고 오늘은 안 왔다. 계속해서 안 올 것 같다. 하기야 그 사람으로서도 공공근로 나가면 하루 한 두서너시간 일하다 놀다가 하고서 일당을 받는데 하루종일 쪼그리고 앉아서 일하고 공공근로보다 못한 임금을 받고 싶지는 않겠지.

 

정부가 이 바쁜 시골의 사정을 감안했는지, 또 자기들의 탁상행정이 모든 시골 일손을 꾀쟁이로 만드는 프로젝트인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을 유채꽃 씨뿌리기, 꽃씨받기, 양파심기, 토란캐기, 꽂감작목반배치 등에 투입한다는 명목인데, 일 잘하고 있는 사람들을 빼내다가 일의 강도를 낮추고 국고를 낭비하고는 그 일에 재투입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토마스와 막딸이 면사무소에 꽂감작목반 일손을 달라고 요청했더니 내일 우리집에도 2명을 보내준다는데 기왕이면 이 동네 사람을 보내주면 좋겠다. 당사자는 면에까지 출근하고, 거기가서 사람을 데려오고, 일이 끝나고 다시 면에까지 데려다 주고 하다 보면 열시에나 일이 시작하고 다섯시에는 가버릴 텐데 말이다.

 

감동식구들에게 점심을 차려주고 나서 오후에는 보스코 컴퓨터 고장 때문에 함양에 나갔다. 모니터에 검은 줄이 비쳐서 작업을 하기 어렵고 그게 그래픽카드의 고장이라는 함양사람의 말을 듣고서 본체와 모니터를 들고 나갔다. 아이들 말대로 하자면, 큰아들 빵기는 "기계치유의 은사"를 받았는데(정말 제네바에 있는 한인들은 무슨 기계든 고장나면 빵기에게 들고 온단다. 무슨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만지면 고쳐진다는 빵기의 설명이다.) 아빠는 "기계 망가뜨리는 은사"를 받은 것 같단다. 여하튼 보스코는 컴퓨터를 잘 망가뜨린다. 다행히 한 두어시간 기다리면서 읍내에서 시장을 보고나니까 고쳐주었다. 본체에 화면설정이 엉켜서 그렇다는 설명이었고 요금은 1만원만 냈다. "기계 망가뜨리는 은사"가 소진되어야 내가 고생을 덜 하겠는데 그럴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전직 교수에 전직 대사인 보스코가 쓰는 컴퓨터가 조립식 싸구려라는 사실은 일단 말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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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보스코가 좋아하는 붕어빵 4000원어치를 샀더니 16마리였다. 감동식구들과 붕어빵 간식 파티를 했다. "아유, 이 시골 감동에서도 붕어빵을 다 먹다니!" 하면서 가밀라 아줌마가 특히 좋아했다. 보스코도 서강대에 나가는 길목에 자기가 좋아하던 붕어빵을 파는데 학생들 보는 눈이 있어서 못 사먹었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그의 연구실에 들르는 기회가 있으면 붕어빵을 사가지고 갔고(물론 빵붕어는 추운 겨울철에만 잡힌다.) 그때마다 그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우리 어렸을 적의 별것도 아닌 작은 기쁨이 추억이 되어 아련한 아름다움으로 남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