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2일 목요일 대체로 맑음. 밤늦게 서울에서는 천둥 울리고 비 내림

 

큰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향년 94세. 아버지는 5형제셨고 내게 고모는 두 분 곧 연천 고모(아버지는 내가 하는 짓이 그 고모를 닮았다고 늘 말씀하시곤 했다.)과 모래내 고모(30여년전 돌아가셨다.) 두 분을  알고 있다. 3남 2녀 다섯 분이 월남하셨고 두 형님은 이북(평강)에 남아 계셨는데 지금 쯤은 모두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측한다.

 

큰아버님은 일찍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내게는 그분에 대한 기억이 없다. 작은 아버지는 십여 년전에 대세를 받고 천주교 신자로 돌아가셨다. 작은어머니는 하도 남편에게 시달려서 일찌감치 입산하여 스님이 되셨고 5년전에 스님으로서 입적 하셨다. 이번에 큰어머니가 94세로 돌아가셨으니까 우리 어머니가 지금 87세로 집안의 유일한 어른이시다.

 

보스코(그는 "처삼촌 산소에 벌초하듯" 문상을 가는 기분이라고 하였다.)와 함께   저녁 6시 45분에 도착한 상가(수원 중앙병원)에서 1세대는 어머니 혼자, 2세대들이 상주들이고 3세대의 젊은 부부들이  10여쌍, 4세대의 어린이들이 수명이 와 있었다. 전씨 일가나 배우자 거의 30명을 만났는데 처음 본 친척(6촌이나 7촌 조카들)이 절반이 넘었다. 이런 대사가 아니면 얼굴도 모르고 지낼 만큼 왕래가 없었다는 얘기다. 우리 집안은 다섯 형제가 상가에 다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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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 호걸 오빠네 가족                                               군자 언니네 가족

 

보다 못해 내가 상가임에도 불구하고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명단을 만들어 억지로 떠밀면서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게 하였다. 자료를 호건 오빠에게 주면서 미선이를 시켜 전화를 해가면서라도 집안 주소록을 만들라고 부탁하였다. 그 와중에도 끼리끼리 모여 앉아 서로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실감났다. 호상이라선지 영화 "축제"에서처럼 잔치집 마냥 웃고 떠들고 깔깔거렸다. 곡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당신의 죽음으로 자손들과 집안을 한 자리로 불러 모으셨으니 큰어머니의 공적이겠다. 큰어머니네는 SGI라던가 하는 종교(나무묘호랑게교라고 알려져 있다.)를 믿는데 낮에 신도들이 와서 일본말로 기도하고 갔다고도 하였다.

 

밤 아홉시에 동생 호천이가 어머니를 용인 유무상통으로 모셔가면서 올케와 자리를 뜨고, 동생 호연이는 11시경에 사촌 보경이를 싣고 김포로 돌아서 집으로 가고, 나와 보스코는 희경이와 호덕이 부부를 싣고서 양재를 거치고 도봉동을 거쳐서 집에 오니 밤 1시였다. 희경이 집에 잠깐 들려서 사는 것을 보고 왔다. 호건 오빠가 우리 집안 대표로  혼자서 상가에 남아 밤샘을 하기로 하였다. 큰어머니는 내일 새벽에  출상하여 화장장을 하기로 정했단다. 어디 가나 우리 친척들은 다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뻑쩍지근하게 떵떵거리는 사람들보다 정겹고 평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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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의 우리 다섯 형제                                       보스코가 모처럼 장모님과 다정하게

 

우리 가운데 나이가 제일 많은 군자 언니네에서 시작해서 돌아가면서 일년에 한 번이라도 만나자고 했는데 가능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모두 타인이 필요치 않은 세상에서, 아니 필요치 않은 듯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 온다. 먼 옛날에 로마 희극작가 플라우투스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고 했고 동시대의 카이킬리우스는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 각자가 본분을 하는 한"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도 실존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외쳤고 같은 시대 같은 프랑스 실존철학자 마르셀은 "타인은 구원이다."라고 하였다는데 시대가 가고 핵가족이 늘수록 카이킬리우스나 마르셀처럼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