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1일 수요일, 날씨 흐리고 오후에는 비

 

어제 선한 이웃에 출근부 도장을 찍으러 갔더니(요양보호사 재가실습은 당사자가 아침마다 해당 교육원에 가서 출근도장을 찍고서 지정된 곳으로 가게 되어 있다.) 교육원 이사장 임종학 목사님이 “내 마음의 정원”이라는 서간집을 선물해 주었다. 스물세 꼭지의 글이 실려 있어서 하루에 두 꼭지씩 읽기로 작정했다.

 

오늘 읽은 글에 가난한 목회자 부부 얘기가 나온다. 개척교회를 하며 아내에게 희생과 인내만을 요구해온 것 같아서 부끄럽기조차 했는데, 그렇게 잘 참아내던 아내마저 생활이 너무 힘들었는지 기도할 힘마저 잃어버린 듯했다. 그날은 하느님께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렇게 간절할 수 없게 기도를 올렸단다. 하느님께 아주 떼를 썼단다. 힘든 십자가의 길을 인정하면서 가야 했던 목회자의 하소연이랄까? 그날은 아무 일도 않고 강단에 올라가 하루 종일 기도를 올렸단다.

 

"선한이웃" 교육원 장경화 원장,

이사장 임종학 목사님과 함께

1938.jpg 저녁 7시까지 작정하고 기도를 하는데 저녁 6시경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누가 목사님께 찾아오겠다는 전화였다. 그 사람의 얘기는 이러했다. 자기가 점심식사 후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개척교회 목사님 한 분을 만나 뵙고 싶은 마음을 하느님께서 주셨다. 그래서 사무실 가까이에 있는 본인의 교회로 담임목사를 찾아갔더란다. 그런데 교회 문이 잠겨 있고 연락이 안 되었고, 손가방 속을 뒤져보니 2년 전 찾아간 목사님 개척교회의 주보와 주소가 눈에 띄더란다. “아, 오늘 그 목사님을 찾아뵈라는 뜻인가 보다!”하고 찾아왔다면서 봉투 하나를 놓고 갔단다.

 

봉투에는 “하느님으로부터 심부름꾼 ooo"라고 씌어 있더란다. 그 금액도 목사님이 필요한 만큼의 딱 그 돈이었다니! “여보, 오늘 하루 종일의 내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오!”라면서 봉투를 내밀었더니 아내의 대답은 눈물뿐이었단다. 가난하고 힘든 시절 벅찬 감격으로 어루만져 주신 하느님의 숨결을 두 분은 늘 그렇게 느껴왔단다. 바로 임종학 목사님의 얘기였다.

 

그 글을 읽으면서 1997년 우리의 로마 카타콤바에서의 기억도 새로웠다. 서강대 교수직 안식년을 맞아 로마에 가서 저 유서 깊은, 순교자들의 무덤 카타콤바 경내에서 집을 구해 살고 있었다. 그런데 IMF가 터졌고, 내가 돈을 맡겨놓고 간 계주 막내올케가 내 돈을 모두 날려서 우리의 생활은 아주 힘들었다.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서 낮에는 햇볕에 차를 대 놓고 그 안을 태양열로 덥혀서 책을 보거나 휴식을 취했고, 밤에는 차디찬 집에 전기장판으로 온도를 유지했다. 보스코는 다행히 살레시오 신부님들이 큼직한 사무실을 하나 줘서 그곳에서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내면서 집필과 번역을 하였다.

 

1997~98년 이태를 머문 카타콤바의 우리집 (하얀 장식의 뒷건물은 "쿠오바디스"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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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서강대 총장이던 이상일 신부님이 우리를 찾아왔다. 교수들 가정방문을 하면서 부인들에게 금일봉을 주기로 마음먹었는데 내가 그 1호라면서 봉투를 줬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그분이 총장직을 그만뒀으니 내가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런 봉투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 돈으로 얼마간 로마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그 뒤 크리스천들의 순례지 카타콤바 전체를 관장하는 원장 죠반니 델콜 신부님이 휴가 가서 자연송이 버섯을 따다가 오십견이 걸려 팔을 전혀 못 쓰게 되었다. 내가 뜨거운 물 마사지와 수지침을 석 달 가량 계속했더니만 완치되었다. 그 일이 고마웠던지 그분은 그 뒤로 우리 집 월세를 전혀 받지 않았고 길갓집이라서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었는데 창문마저 이중으로 공사하여 소음을 막아 주었다.

 

우리 결혼(1973년) 후 40여년을 돌이켜 보더라도, 경제적으로 어려울 적마다 언제나 기적 같은 도움의 손길을 펼쳐주신 하느님과 그분의 심부름꾼들이 있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그 어렵던 여러 고비를 무사히 넘겨 왔다. 이제는 우리가 그분의 심부름꾼이 될 차례인가 보다.

 

어제 세차를 했는데 밤에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하느님은 꼭 내가 세차한 날을 잡아서 비를 내리신담?” 하고 푸념하려다가 하느님께서 “너는 꼭 내가 비를 내리려고 맘먹으면 그 날 세차를 하더라. 세차하고서 비 맞히는 게 네 취미냐?” 하실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우리의 삶도 하느님의 비로 온 세상 생명들이 살아가는데 우리는 자칫하면 세차 하나를 들어 하느님께 불평하거나 대들기 십상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하느님이 손수 어둔 밖에서 내 차를 씼고 계시지 않는가?

 

델 콜 원장님이 창문을 고쳐준 다음 로마의 그 집에 불이 나서 우리 부부가 기적처럼  목숨을 건진 얘기는 보스코의 홈피 “살아온 이야기” 첫째 꼭지에 실려 있다. 빗소리가 주룩주룩 소리나는 이 한 밤에 우리가 살아온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이고 기적임을 새삼 절감하면서 두 손이 모아진다.  

 

보스코는 오늘 아침에 프레스 센터에 나가서 한명숙씨의 서울시장 출마선언에 종교계 대표로 배석하고 왔다. 그에게서 좀처럼 못 보던 행적이다. 글을 쓰거나 데모에 참석하는 일 빼 놓고는 절대로 정치적인 제스쳐를 하지 않는 보스코가 이번에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시국을 상당히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 천안함으로 정국을 완전히 침몰시켰던 시국이 어젯밤 방영된 “색검사” 사건으로 침몰당하는지 눈여겨 볼 차례다.

 

오후에는 보스코를 데리고 우리 집 주치의 곽선생님의 서정치과에 가서 지난 겨울 뺀 어금니 자리에 걸개를 하기로 하여 보스코가 두어 시간 어금니를 갈고 왔다. 토요일에 금니를 씌우고 월요일에 확인을 한 다음 그 길로 지리산에 내려가기로 하였다. 너무 오랫동안 떠나온 산이어서 그 품이 너무너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