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8일 일요일, 날씨 맑음. 초저녁에 비 한두 방울

 

시아가 집에 있어서 어른미사 대신에 학생미사에 가자며 8시 45분에 집을 나섰다. 시아는 외할머니 말대로 “까불이”이지만 첨 보는 사람에게는 인사를 않거나 엄마 뒤로 숨어 고개만 내밀면서 낯을 가리는 편이다. 오늘 같은 경우 수녀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데도 홱 뿌리친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무제-1.jpg   걔가 여러 면에 나를 닮았다는데 그 점은 정말 나를 닮지 않았다. 빵기도 어렷을 적에 그런 일이 없었으니 그럼 누구를 닮았을까? 보스코도 낯선 자리에는 안 가려고 한다. 명동성당을 가더라도 나는 명동중심가를 걸으면서 상점 구경 사람 구경을 좋아하는데 그는 늘 가톨릭회관 쪽으로 삼일로쪽으로 돌면서 인파를 피하려고 하지 명동 복판을 가로지르려고 하지 않는다.  

 

   시아 역시 제 아빠가 사서 보낸 배터리로 BMW 자동차를 수리해서 방안에서 타고 다니게 해놓았지만 한 1, 2분 타고나면 그만이다. 도통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물건을 사오거나 선물이 오거나 무엇을 보고 좋으면 나는 잠도 안 자고 일어나서 보고 또 보고 하는데, 보스코는 심지어 소포가 와도 "내일 보지 뭐." 하면서 밀어 놓는다. 궁금해서 어떻게 견디나 모르겠다. 새 옷을 사와도 보스코한테 한 번 입혀보려면 여간 힘들지 않다.

 

보스코 얘기로는, 어렸을 적에(6.25 직후) 미군들이 새 자전거를 선물로 갖고 와서 태워주면서 사진을 찍는데 카메라 앞에서 한번 올라앉은 게 전부였다면서 그가 안 타니까 얼마 뒤 결국 다른 아이한테 선물로 가버렸다고 한다. 요새 시아가 하는 행동 그대로다. 어쩌면 핏줄은 저렇게나 서로 닮는담?

 

                                                                                                           할아버지 호스를 빼앗아 꽃밭에 물주는 시아

DSC01860.jpg 이런 말을 들으면 "오지랖이 구십 리"인 마누라를 두어서 그나마 사람들이 우리 집을 드나들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또 한사코 집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보스코다. 한 달 손님이 수십 명이던 때도 있었으니 이 점은 또 무엇으로 설명한담? 결혼전 그가 반년 동안 직장에 다니면서 하숙생활을 할 적에 하숙집 아주머니가 한 예언이 있었다. "총각은 마누라한테 지극정성으로 대해주겠지만 마누라 고생을 죽도록 시킬 사람이야. 사람을 어지간히 집으로 끌어들일 사람이거든." 그 아주머니의 예언은 너무도 적중하였다. 내가 해 온 고생이 "죽도록"까지는 아니었지만....

 

미사 후에 집으로 올라오다가 길에서 “옥이엄마”를 만났다. 지난 겨울에 옥이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이번에야 들은 터라서 조문인사를 드렸다. 옥이네는 지금 우리가 사는 집의 주인이었다. 33년전에 우리가 이 집을 옥이네한테서 샀다. 그들은 이 집으로 이사 와서 사업이 망하고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남편이 풍으로 쓰러졌고, 그래서 점을 보니 집터가 나빠서 그러니 빨리 이사 가라고 하더란다. 그 일로 우리가 집을 시가보다 훨씬 싸게 샀다. 옥이아빠는 그렇게 31년간 반신불수로 고생하다 돌아가셨다.

 

집에 들어오자 시아는 송총각 방에서 요가 매트를 끌고 나와서 나와 할아버지를 차례로 김밥으로 말아서 올라타고 노는 “김밥말이” 놀이를 하였다. 또 빨래해서 쌓아놓은 송총각의 수건빨래를 들고 나오더니 “할머니, 왜 안 갰어?”라고 따진다. “응, 삼촌이 시간이 없어서.” “그럼 우리가 하자.”더니 나더러 수건을 다 개게 한다. 저도 하나 개는 시늉을 하면서.... 또 송총각 방바닥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이면서 “아이, 지더러워!”라고 흉을 본다. “지더러워”는 “지저분하다”와 “더럽다”를 합성해서 만든 시아의 단어장이다. 시아의 저런 모습은 영락없이 나다.

 

할머니를 김밥으로 말아 올라타고서 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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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에 시아한테는 본인의 주문대로 자장면을 만들어 먹였다. 그 꼬마가 무슨 맛을 아는지 부지런히 잘 먹는다. 점심 후에 시아와 어미를 싣고 청담동 외가로 갔다. 손자를 잠시라도 더 보고 싶었는지 보스코도 함께 갔다. 청담동 사돈네 집 앞까지만 데려다 주고 폐가 될까 봐 우리는 그냥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송총각 방에 갖다놓은 책장에 쓸 판자에다 칠을 하려고 통을 구하러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법성암 옆집에 크고 작은 페인트 통들이 쌓여 있기에 주인에게 가져다 써도 좋으냐고 물으니 다 버릴 것들이니 가져다 쓰란다. 나무판자에 칠하는 무광 라커도 한 통 있었다. 시너까지 섞어 놓은 것이라서 들고 와서 칠해 보니 판자에 서너 번 칠하고도 남는 분량이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어제 돈 주고 페인트와 시너를 사오지 않는 건데....

 

판자에 라커를 칠해놓고 보니 제법 근사하다. 저녁에 총각이 책장을 정리하면서 자기 방에서 제일 멋진 가구라고 좋아한다. 길에서 주어다 판자 2만원, 페인트 1만 5천원 도합 3만 5천원에 멋진 책장을 만드는 기분은 해 본 사람만 안다.

 

누구는 지지궁상이라고 흉볼지 모르지만 버려져 부셔지고 불태워질 물건을, 가져다 수리하여 살려내는 재활용은 하느님의 재창조사업에 참여하는 일일 게다. 저 책장 만드느라 몇 그루의 나무가 생명을 버렸을 텐데 말이다. 그 나무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는 뜻에서라도 함부로 버리거나 태워 없애면 아까우리라는 것이 우리 집의 소위 “가구철학(家具哲學)”이다. 그래서 서울집 가구들은 제각기 성(姓)이 다르다. 말하자면 엄마에게 길거리로 버림받았다 우리에게 입양된 가구들인 셈이다.  

 

오랜만에 송총각과 저녁을 셋이서 먹었다. 그가 시무하는 교회 얘기도 나누고... 그를 보면 꼭 작은아들이 생각난다. 빵고가 며칠이 되어도 소식이 없다. “우리 작은아들이 엄마 생각이나 할까?” 섭섭해서 원망하다가 실버타운 노인들이 생각났다. 이번에 실습을 하면서 할머니들 얼굴도 발도 씻겨드리고 목욕도 시켜드렸는데 내가 엄마의 얼굴을 씻겨드리거나 목욕을 시켜 드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옹이진 그 발도 한 번도 씻어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하, 사랑은 이래서 내리사랑이로구나.”하였다. 이 일기장에서도 내내 손자 타령이고 아들 생각이면서 엄마에게 생각이 미치는 건 정말 드물다는 사실! 가까운 시일에 엄마에게 찾아가면 발이라도 한번 정성스레 씻어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