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7일, 토요일, 말씨 맑은 후 흐림

 

아침에 며느리 지선이가 전화를 했다. 아이슬란드에서 폭발한 화산 구름이 유럽 하늘을 뒤덮고 있어서 유럽 거의 전역에 비행기가 뜨지 못해서 어제 파리를 거쳐 제네바로 가는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의 한 주간은 대기해야 하나보다.

 

얼마 전 “지구의 날”인가 TV에서 다큐맨터리를 본 생각이 난다. 지금의 인도네시아 어느 섬에서 커다란 화산 폭발이 있었고 그 화산 구름으로 지구의 3분의 1이 뒤덮혀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는 바람에 지구의 최근빙하기가 왔다는 얘기였다. 1만 3천년전 얘기란다. 이번에도 중국에서는 지진이 일어나 1천여 명의 사상자가 났고 세계도처에서 기상이변으로 한냉기후의 피해가 지독하다. 그런데도 기후문제에 가장 큰 피해를 주고 있는 미국과 중국은 서로 미루면서 “당신 어떻게 좀 해 봐!”라고들 한다. 화산 하나의 폭발이 유럽 최대 항공대란을 초래할 만큼 인간과 인류가 취약하면서도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일들은 얼마나 가관인가?

 

지선이가 오늘 왔다가 내일 점심 후 가겠다니 시아를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지선이는 빵기가 혼자 있고 자기가 하는 알바 때문에 마음이 바쁜가 본데 천재지변이니 어쩔 수 없이 견뎌내나 보다. 우리는 아무튼 손주를 한 번 더 보게 돼서 계를 탄 기분이다.

 

아침에는 목공소에 가서 엊그제 주워온 송총각네 책장에 깔 칸막이 판자를 잘라오고 방학동까지 가서 페인트도 사왔다. 그리고 영심씨랑 "선한이웃" 교육원에 들러 지난 한 주간 동안 실습한 보고서(일지)를 제출하였다. 원장에게는 잘 가르쳐 주어 고맙다는 인사도 하였다. 우리 동기 중의 한 사람은 실습장에서 “죽어라 일만 시키고 원장님이 로비를 해 두지 않아서 제일 고생스러운 일만 맡았다.”고 민원을 올리려다 참았다니 생각하는데도 말하는데도 사람은 여러 종류인가보다. 돌아와서는 개나리가 핀 언덕에서 영심씨네 부부랑 우리 부부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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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에 지선이가 시아를 데리고 택시로 도착하였다. 피붙이라는 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언제나 살가운 게 손주다. 시아는 오자마자 놀이를 하자고 할머니를 조른다. 외할머니가 “손정숙 할머니[= 외할머니]가 더 좋아? 전순란 할머니가 더 좋아?”라고 물었더니 서슴없이 “전순란 할머니!”라고 대답하더란다. “어째서?”라고 물었더니 “바빠서(= 나한테 필요해서).”라고 대답하더라나. 사부인은 "외손주 봐 주느니 파밭을 맨다."라는 속담이 생각나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손주 업고 친손주 걸리면서 업은 애기 발 시리니 [친손주더러] 빨라 가잔다."라는 속담도 있다. 며느리 말마따나 시아와 내가 궁합이 맞아서 함께 떠들고 함께 놀아주니까 그런가보다.

 

점심을 먹고는 며느리더러 쉬라고 하고 보스코와 내가 시아를 데리고 솔밭공원엘 갔다. 놀이터에 큰애들이 많아서 아이가 치일 것 같다. 아이들한테 밟힐 것 같다고 할까? 한 시간 반 쯤 놀게 하고 간식을 하는데 비둘기가 자꾸 먹이를 달라고 보챈다. 모이를 떼어 주는 시아의 모습을 보니 먼 옛날(1981년) 로마의 성베드로 광장에서,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에서, 밀라노의 두오모 광장에서 비둘기 떼에 모이를 주던 빵기와 빵고 모습이 떠오른다. 이렇게 삶의 정경은 끊임없이 반복되는데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같지 않다.

 

2010년 4월 17일 우이동 솔밭공원에서      1982년 2월 로마 비토리오임마누엘레광장에서

빵기의 아들 성시아와 할머니                      빵기(앉아 있는)와 빵고(서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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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1806.jpg    돌아오는 길에 도봉도서관에 들러서 아가들이 책을 읽고 노는 온돌방에 시아를 데리고 들어갔다. 걔는 공룡 얘기를 제일 좋아하고 자꾸만 읽어달라고 조른다. 걔가 아는 공룡도 제법 있어 유식해 보이기조차 해 할머니 어깨가 으쓱했다. 보스코가 끊어온 도서대출 카드로 공룡 얘기 세 권과 이외수의 “장외인간”이라는 책도 빌렸다.

   추운데서 놀았고 도서관 온돌방이 따스해선지 시아가 꾸벅꾸벅 존다. 그것도 귀엽다. 잠들면 안고 가기가 무거울 것 같아서 아이를 달래서 걸려 가는데 백운초등학교 야구부가 연습을 하고 있어서 다시 들려 한참이나 구경을 시켰다. 별다른 흥미 없이 멍하니 쳐다보는 게, 시아도 운동을 잘 할 것 같지는 않다. 확실히 씨도둑질은 어렵다. 놀이터에서 바람이 찼는지 시아가 자꾸만 코를 흘린다.

 

집에 와서는 시아가 놀자고 조르는데도 지쳐서 내가 한 잠을 잤다. 5시에는 시아와 시아 어미와 보스코를 차에 싣고 “서당골”엘 갔다. 우리 “목우회” 식구들과의 만남인데 내 생일턱으로 보스코가 쏘았다. 시아는 식당에 가자마자 잠들어 두 시간 내내 낮잠을 잤다. 한 달에 한번 꼴로 서당골에서 만나는 목우회 회원들은 시국관이나 말이나 그 함축된 내용이 모두 통하는, 그야말로 동지들이다. 그래서 언제 만나도 기분이 좋다. 좁쌀 동동주에 전까지 먹고 딸딸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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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서는 낮잠을 잔 시아가 함께 놀자고 조른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동굴놀이”를 하고, 이불을 펴고 “물놀이”도 하고, 이불로 감는 "김밥놀이"도 하고, 침대에 잠든 할아버지를 괴물로 삼아 주사를 주고 배를 찌르고 차고 때리는 “괴물사냥”도 하고, 나와 숨바꼭질을 하면서 10시 반이 되어도 잠들 생각을 않는다. 이불로 포대기처럼 싸서 노는 "응애 놀이"에서는 시아가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이 나왔다. "응애 응애. 나는 베베야. 뉴뉴 베베. 우유도 안 먹을래, 밥도 안 먹을래, 쇼콜라[초코렛]만 먹을래. 사탕만 먹을래. 응애 응애. 치과에도 안 갈거야. 응애 응애 우리는 착한 애기."

 

시아의 숨바꼭질은 독특하다. "할머니, 나 여기 숨을께 찾아요." "시아야, 어디 숨었니? " "여기!" "할머니, 어디 숨었어? 가르쳐 줘야 찾지!" 마침내 내가 항복하고 잠을 자라고 안방에 데려다 어미에게 건네주니 이번에는 TV 한 프로를 보고서야 잠들겠단다.

 

반쯤 졸면서 일기를 쓰고 있다.  12시가 다 되었다. 내 팔자야, 누가 나더러 일기를 쓰라고 시켰더라면 난리가 나도 백번은 났을 텐데.... 시아의 행동원칙대로 "내가 결정한 일은 내가 책임진다!"(? ) 그 손주에 그 할머니라고들 하겠다. 그러나 마루방에서 코를 고는 보스코나 조용해진 안방에서 며느리와  시아가 잠든 집에서 자정에 글을 쓰는 순간은 참 뿌듯하다. 나는 참으로 많은 걸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