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4일 수요일, 맑고 차가운 날씨

 

아침 일찍 송총각과 우정골드빌 연립주택 코너에 버려진 책꽂이를 주우러 나갔다. 어제 저녁에 들어오면서 기억해 둔 물건이고 송총각 쓸 것이니 혼자 들고 오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정작 들어보니 지나가던 영심씨를 불러 셋이 함께 들어도 보통 무거운 게 아니었다. 내가 송총각을 헤라클레스로 착각했던가보다. 보스코도 불러서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의 체면을 생각해서 참았다.

 

옛날 로마에서 공부할 적에는 비아 아우엘리아에는 쓰던 가구 공동묘지가 있었다. 가난한 유학생들은 책상, 의자, 식탁, 침대 등을 거기서 챙겨왔다. 그때 가까이 지내던 이대성씨, 그와 이혼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사는 말라기타씨랑 그 가구공동묘지에 자주도 갔었다. 그 행복하던 시절은 흘러갔고 이제는 내 것마저 정리해 가면서 버릴 것은 버려야 할 시간이 가까이오고 있다. 그러나 나이 서른의 송총각에게는 뭘 좀 주워 주어도 될 것 같아서 충돌질을 했는데 마음 착한 총각은 끙끙 소리를 내면서 가구를 들여왔다.

 

그 일을 하면서 “전도사” 송총각이 들려준 얘기가 감동적이다. 미얀마에서 14세 이하 청소년들을 군대로 차출하는데 그 징집을 피하려고 자기 나라를 탈출한 소년들을 태국에서 모아 공부시키는 한국인 여자가 있단다. 여행하다 그곳을 방문한 한국인 젊은 여자 셋이 그 사업을 보고 뛰어들어 그들을 함께 돌보는데 돈이 떨어지면 한국에 돌아와서 직장생활을 하여 돈을 벌어 그 가엾은 젊은이들을 돕고 있단다. 송총각 교회 청년들이 그 얘기를 하면서 “이렇게나 편하게 사는 우리들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자성의 소리를 내면서 고민하더란다. 자기네 삶을 다 접고 태국에서 젊은이들의 자활을 돕는 일에 헌신하는 아름다운 이들이 사는 세상이기에 우리가 니느웨처럼 되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maesot1064.jpg

 

요양보호 실습이 11시에 시작하는데 5분전에야 헐레벌떡 도착하였다. 시작이 늦어서 한가할 줄 알았는데 할 일이 그렇지 않다. 오늘은 4층에서 무슨 쇼가 일어날까 자못 궁금하다. 먼저 몸을 못 움직이는 할머니 네 분을 옷 벗겨 목욕시켜 드리고 크림 발라드리고 옷을 입혀드리고 머리를 말려드리고 하였다.

 

‘내가 돌보는 방에 할머니 하나가 아침도 안 들고 점심까지 안 들겠다고 버티면서 입이 잔뜩 부어 누워있다. 요양사는 할머니를 깨우다가 안경이 날아갈 만큼 심하게 뺨을 맞았단다. 내가 가서 깨워도 “너는 또 뭐야?” 라며 들은 척을 안 했다. 식사를 못하면 알츠하이머 약도 못 먹고 증세가 더욱 나빠지기 때문에 꼭 달래서 밥을 먹여야 하는데 도리가 없었다.

 

그래 옆방에 있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어디 여자 친구 좀 달래보셔요.” 라고 했더니 “마음이 상한 사람을 함부로 그렇게 대해서 쓰나? 어이, 김여사, 그만 일어나요. 밥 먹어야 산책을 가지!”라고 달랬다. 그러자 티셔츠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한참 뜸을 들이더니 결국 일어나 앉았다. 식사 후 두 분은 노란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부동산문제와 집값상승, 투자와 환매 등 제법 유식한 말을 주고받았다. 내용을 들어보니까 완전히 동문서답이고 줄거리도 없지만 아주열심히 아주 재밌게 얘기를 이어간다는 게 퍽 신기하였다. 더구나 마지막에 가서는 할아버지가 “나 오늘부터 김여사를 사귀기로 선언한다.”라고 해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교장선생님이었던 분도 한 분 있는데 앞으로 90도 각도로 몸을 꺾고 있어서 침과 코를 줄줄 흘리고 있다. 희준씨가 거의 매달려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다가가 “교장선생님, 안녕하셔요? 9 7은 얼마죠?” “63.” 하면서 머리를 꽂꽂이 든다. “2 8은?” “16.” 그 외에도 어려운 구구단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척척 맞힌다.

 

A동 입구에는 젊은 남자가 친숙하고 잘 생긴 얼굴로 앉아 있다. 이름과 나이를 보니 나와 동갑이다. 내가 가까이 가서 “어떠세요?”라고 말을 걸었다. “아주 바보가 됐어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요.” “이름은요?” “OOO요. 마누라는 김OO이구." "애들은요?"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었던것 같은데  이름이 통 생각 안나요. 큰일 났어요. 나 어떡하죠?" “아마, 차츰 기억이 돌아올 거에요.” "답답해요. 머리속이 하예요." 그 사람은 자기 머리 속을 어떻게 하얗게 비웠을까? 더구나 그 하얀 백지에 아무것도 그려낼 수 없으니 딱하기 그지없다. 밥 먹고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있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니, 집에 돌아와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워진 기억을 찾아 헤매고 있을 그가 생각난다.

                                                                   어느 해 사진일까? 보스코가 북한산 시화제에서 축사하던 장면

시화제-02.jpg 보스코는 조봉익씨의 초대로 중국식당 “황성”에 식사를 하러 나갔다 10시가 넘어서 돌아왔다. 시인 임보 선생님과 홍해리 선생님이 함께 나왔다고 하였다. 도봉구 공무원이면서 시인이 되려고 임보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는 그분은 광주고등학교 인연으로 보스코를 초대한 것 같다. (보스코는 광주고등학교에 한 학기 다닌 적이 있다고 한다. 시험 삼아 그 학교 입시에 응했다가 수석합격을 해서 그 학교 체면을 살리느라 하는수없이 한 학기 다니고 다시 살레시오고등학교로 돌아왔단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수사신부가 되는 길을 닦던 중이었다.)

 

 이달 말 25일에는 북한산 시화제(詩花祭)가 있다니 참석해야겠다. 80년대, 90년대 해마다 우이동 시인들의 시화제와 단풍제에 참석했는데 2003년부터 지금까지 빠졌으니 이번 일요일에는 오랜만에 그리운 시인들과 풍악인들을 만나봐야겠다. 날이 하도 추워 산벚꽃이 그날까지 필지는 모르겠다. 보스코는 그날 축사를 해 달라고 부탁 받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