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1일 일요일, 날씨 맑다가 잔뜩 흐려지더니 저녁에는 빗방울 지다

 

시아와 지선이를 데리고 우이성당엘 갔다. 보스코는 교우들에게 손자 자랑을 하고 싶어서 5분이면 도착하는 성당에를 30분도 더 남겨놓고 집을 나서려고 서둔다. 시아가 성당에서 한 시간 견디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여자들과, 내 핏줄을 남에게 내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남자들은 어디가 그렇게나 다를까? 남도 다들 두고 있는 손자를 왜 그렇게 남에게 자랑하고 싶을까? 이해도 가면서도 그토록 좋은 아들과 손자를 멀리 스위스까지 보내놓고서 몇 년에 한 번 손자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의 처지가 안 됐기도 하다.

 

성당 3층 유아실에 있는 책들과 형들을 보고 시아는 낯을 가리지 않고 즉시 그 방 분위기에 적응하였다. 미사 후 어린이들이 본당신부님께 안수축복을 받는 행렬에 시아도 끼었지만 얼마나 얼굴을 찌푸렸는지 몰라도 성당 현관에서 신부님께 “야, 너 나한테 유감 있어?” 라는 말씀을 들어야했다. 낯가리는 것 여전하다.

 

오는 6월이면 서품을 받을 바오로 부제가 요즘 주일 강론을 한다. 사제가 되면 즉시 외국으로 선교가는 한국외방선교회 소속이라선지 본당신부님의 배려가 각별한 것 같다. 오늘 복음은 부활한 예수님을 사도들이 만나 뵐 적에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 사도의 얘기였다. 우리는 앵무새처럼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외우는데 불신앙의 사도로 꼽히는 토마스의 순진함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라는 요지였다.

 

손바닥에 못자국이 뚫리고 옆구리에 창자국이 난 분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면서 끌어안는 사도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는 참신한 설교였다.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서 전폭적으로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도의 모습에다 김부제는 내가  존경하는 고(故) 조영래 변호사의 삶을 비유했다.

 

조영래씨는 광주시민학살범이요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의 독재가 한창일 때, 수재민이나 진폐증환자나 전화교환원 등 가난하고 법적으로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의 변론을 맡았던 크리스천 변호사다. 특히 1986년에 부천성고문 피해자 권인숙 양을 맡아서 용감하게 변호해준 의인(義人)이다. 정권의 충견으로 타락한 검찰과 법원의 장난으로 오히려 피해자 권인숙씨가 13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여성 피의자에게 성고문을 한 문귀동 경장은 국가에 공헌하였다고 기소조차 되지 않은 어처구니없는 시대였다. 6월 항쟁의 거센 민중봉기에 군부가 주춤하면서 대법원이 조영래 변호사의 항고를 받아들여 1988년 권인숙양이 석방되고 성고문 경찰관 문귀동은 5년의 장역을 선고받기에 이른다. 한명숙 전총리의 재판을 보면 검찰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43세에 폐암으로 요절했지만, 이 사회의 상처 입은 이의 몸뚱아리를 보듬어 안은 조변호사와, 예수님의 손바닥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던 토마스 사도가 부제의 눈에는 한 사람처럼 겹쳐보인다는 요지의 강론이었다. 김부제의 강론이 갈수록 좋아진다. 훌륭한 신부님이 될 사람이다.

 

점심은 본래 빵기가 좋아하던 “춘천막국수집”에 가서 먹었다. 며느리는 그 짧은 입에도 막국수는 제법 맛있게 먹었다.  시아는 난생처음 먹는 음식인데도 동치미국물을 마셔가면서 물국수를 잘도 먹었다. 걔의 유전자에 막국수호감인자가 있나 보다. 아무튼 음식을 가리지 않는 아기는 성격이 좋고 사회생활도 무난하리라는 예감을 품을 만하다. 보스코는 여간 입맛이 까다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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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옆에 있는 솔밭공원을 다시 찾아갔다. 손자를 소나무에 걸터앉히고 사진을 찍으면서 감회가 컸다. "이북 5도민"의 모임이 항상 열리는 우이동 솔밭을 건영이 사서 소나무를 베고 고급 빌라를 짓겠다고 하였다. 우이동 고향산천이라는 음식점이 할렐루야기도원에 팔려나가자 수백 년 된 등산로를 자기 땅이라고 막아버렸다. 국립공원에 인접한 구선덕학교 부지에, 북한산 비탈에 고층아파트를 짓겠다고도 했다. 장흥에다 수도권 최대의 위락시설을 만들 욕심에서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의 우이령에다 4차선 대로를 내겠다고 하였다. 수령 천년의 방학동 은행나무도 잘려나갈 뻔했고 우이천은 구청직원들의 농간으로 살벌한 시멘트바닥이 되어 갔다.

 

그 시절에는 무슨 힘이 났는지 모르지만 많이도 싸웠고 끈덕지게도 싸웠다. 대부분 우리 뜻을 관철시켜 환경을 지켜냈다. 우이령은 지켜졌고(이회창 총리), 우이동 솔밭은 서울시가 매입하여 보존했고(고건 시장), 선덕학교 부지의 대우아파트는 5층으로만 올려졌고, 세이천(洗耳川) 등산로는 확보되었다(김형태 변호사). 덕분에 오늘 우리 손자가 그 솔밭공원에 와서 놀이터 미끄럼틀을 타고 있지 않은가? 환경을 지켜내면 후손이 혜택을 받는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로구나!

 

그 당시에는 한밤중에 우리집 대문을 부수고 가거나 대문에 (빨갱이라고) 붉은 페인트를 칠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당까지 패거리를 보내 “당신 배에는 칼 안 들어가?”라는 시비를 걸기도 했다. “당신, 할렐루야기도원이 어떤 단첸 줄이나 알아?” 이것은 건축 조합장 깡패가 한 말이 아니라 담당 형사가 직접 찾아와서 협박하던 말이다. 그때 함께 활동한 북한산 털보, 우이동시인들, 강북과 도봉의 성당과 교회들, 서울의 환경문제를 비중 있게 다뤄주던 언론들이 생각난다.

 

698.jpg    엊그제는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지 않겠다고 버티던 태도와 달리 시아가 오늘은 적극 놀이기구에 다가갔다. 제 엄마 얘기로는 그날은 본인이 놀 마음 자세가 안 되어 있는데 놀이를 강요당해서 그렇게 뽀로통했었단다. 오늘은 제가 놀고 싶어서 노는 거니까 일체의 모험을 감수할 것이라는 말이다. 자신의 뜻과 반한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생소한 며느리의 말이지만, 아무리 작은 아이라도 인격체로 존중해주고 본인의 결정 하에 책임을 갖게 훈련시키는 스위스 교육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첫걸음을 심어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고국으로부터 멀리 있어 좀 고생스럽더라도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우기로 결정한 아들 부부가 대견하기도 하다.

 

831.jpg 과연 시아는 본인의 결정에 의해 바이킹을 타기도 했고 그네도 본인의 결정에 의해서 탔다. 3,4학년짜리 형들이 타는 높다란 미끄럼틀도 본인이 정해서 탔다. 그때마다 겁에 질린 표정이었으면서도 자기가 하겠다고 결정하고서 하는 일이어서인지 한 번도 울거나 떼를 쓰지 않았다. 집에서도 할머니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목욕이나 옷입기나 음식먹기는 반드시 지켰다.

 

꿈같은 일주일이 지났고 시아가 3시에 떠났다. 외할머니가 보내준 차를 타고서 외가로 떠났다. 그가 남긴 정적과 고요가 우리에게는 쓸쓸함을 동반한다. 아이의 깔깔 웃음소리와 할머니와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어른스럽게 목소리를 착 깔고 덤비던 장난끼가 며칠을 두고 눈에 밟힐 것 같다. 핏줄에 칭칭 감기는 것은 할아버지만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