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7일 수요일, 날씨 맑음

 

시아가 햇볕에 나가면 유난스럽게 눈을 뜨지 못한다. 선글라스를 쓴 아가들은 서양에서 자주 보았는데도 이곳에서는 시아의 선글라스를 하나 사 주려니까 몇 군데 안경점을 돌아다니고서야 겨우 발견했고 그나마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아는 눈이 안 보이는지 잔뜩 찡그렸고, 그것도 멋이라고 선글라스를 사고서는 차 안에서도 벗지 않으려고 했다.

 

그 녀석을 병원에 데리고 가려는데 입국증명이 아직도 넘어오지 않았다고 건강보험공단에서 연락을 했다. 우선 동사무소에 가서 가족관계증명서를 뗐다. 우리 아들 성하은(成賀恩)을 중심으로 아버지 보스코, 어머니 나, 아내 오지선(吳芝善), 아들 성시아(成始娥)가 차례로 등록되어 있었다. “아하, 내 아들이 버젓이 한 가정을 이루고 있구나!” 하는 사실이 공공서류상으로 확실해졌다.

 엄마의 빨래널기를 돕는 시아

무제-1.jpg 얼마 전 내가 어떤 자리에서 아들을 결혼시키고 나니 며느리와 아들이 가족을 꾸미고 자기들의 생활에 충실하고 아내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한 적 있다. 내가 내 남편을 내 사람으로 생각하듯 며느리에게는 아들을 그니의 사람으로 내어주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의 삶을 다 접고 남편 하나 바라보고서 산 설고 물 선 곳까지 따라가 그 남자의 아이를 낳고 가난한 살림을 불평 없이 해내는 며느리가 사랑스럽고 고마울 뿐이라는 얘기였다.  

 

그 얘기를 듣던 명자씨 말이 나더러 “제2의 탯줄을 확실하게 끊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정말이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자기 뱃속에서 이미 나간 생물학적 탯줄은 끊었는데 심리적 탯줄을 끊지 못하고 있어서 고부간의 갈등이 생긴다. 또한 효자인 아들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가도 알만하다.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맞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맞을 것이다. 교육원에서 들어봐도 50대 아줌마들 얘기와 40대 아줌마들의 얘기가 전혀 각도가 다르다.

 

12시에는 시아를 데리고 곽선생님의 “서정치과”에 갔다. 시아의 이를 살펴주셨는데 다행히 아기가 어른스럽게 의젓이 입을 벌리고 진료를 받고 혼자 의자 위에 서서 엑스레이를 찍기도 하였다. 세 살 반인데 떼쓸 때를 보면 아이지만 저럴 땐 말귀 알아듣고 하는 행동거지를 보면 기특하기만 하다. 손주가 저렇게 자랑스러우니 나도 어쩔 수 없는 할머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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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생님은 지선이의 이도 정성스럽게 스캘링 해주고 내 이도 치석을 제거해 주었다. 언제나 변함없는 그니의 서비스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그나마 건강한 치아를 유지하고 있다. 이-마트에 들러 시아의 책을 사고   그 옆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 마디로 “거지 같다.” 이럴라치면 차라리 집에서 먹을 걸...

                                                                                                                               할머니에게 한글 읽기 배우는 시아

무제-2.jpg 오후에 보스코가 출입국사무실에 전화해서 독촉을 하니까 건강보험공단 도봉지사에서 전화가 왔다. 시아의 입국사실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해 줄 일을 일주일이나 끌었는지 속이 상했다. 어떻든 공단에 가서 아예 보험증을 타냈다. 시아는 어리고 한 달 안에 나가니까 3000원의 보험료만 내면 된단다. 내일 당장 시아를 데리고 안과도 가고 귀도 볼 겸 이비인후과도 가 봐야겠다. 우리가 매달 30만원 가까운 보험료를 내면서 속생해 하였는데 거기서 우리 손주가 덕을 본다는 생각이 들어 억울할 게 별로 없을 듯하다.

 

80년대에 이탈리아에 있을 적에도 보스코가 학생신분이어서 소득 없는 극빈자로 분류되어 공짜로 빵기의 축농증수술, 빵고의 맹장수술 등 많은 치료를 받아왔다. 유럽이 점점 제3세계 사람들에게 인색하게 변해가지만 그래도 이탈리아는 비교적 너그러워서 심지어 집시들도 애를 낳으려면 다들 이탈리아로 모인단다. 그곳에서는 일단 응급실로 들어가면 모든 비용과 수술과 입원이 무료로 이루어지니까 분만도 당연히 무료다. 사람은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는 게 아니고 살아갈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로마의 대공원 빌라보르게세(Villa Borghese) 속에 있는 빈집에 부랑인이 들어 살고 있는데도 시청이 쫓아내려다 못하고서 나중에는 전기와 수도시설을 해주던 광경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부랑인 노숙자들에게도 삶은 의무니까...   군대문화에 젖은 우리나라에서는 약자는 살아남을 여지가 없는 듯하다. 서울의 재개발, 뉴타운 하면서 원주민의  20퍼센트가 새 아파트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다 쫓겨나는 신세라니까 말이다.

 

무제-3.jpg 오늘 밤에도 시아와 11시까지 “어린 송아지가 뜬숯 위에 앉아 울고 있어요.”를 노래로 부르고 춤으로 추고하면서 놀다보니 놈은 지쳐서 잠들고 나는 일기를 쓴다. 보스코는 일찌감치 마루에 펴놓은 침대에서 코를 골고 있고 며느리는 안방에서 잠들어 있다. 며느리 뱃속의 둘째 손주가 힘들어 할 게다. 남편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가 한 집에서 잠들어 있으니 여자로서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이렇게 행복하니 삶은 단지 의무만 아니고 선물이고 기쁨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