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2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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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집 담밖에 한 그루 벚꽃이 만개했다. 45년 전 우리가 이사 오자마자 동네 아줌마들이랑 벚나무를 사다 산자락에 심어 꽃길을 만들었는데 연립주택이 들어서며 다 베어져 나가고 단 한 그루만 남았다. 그미들(지금은 다들 이사 갔지만)과 함께 만든 주민 놀이터는 지난 달, 그러니까 40년 훨씬 넘어 '둘리쌍문공원'으로 꼴을 갖추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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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 금요일에 집 페인트칠을 하러 오겠다던 아저씨가 안 오자 우리 둘이 더 바빴다. 서울집 다락에 40년간 묵혀둔 짐 가운데 앞으로도 쓸데없을 것들을 추려내서 이층으로 내려놓고, 거기서 다시 아래층으로, 그 다음 마당으로 내놓았다. 사흘에 걸친 다락방 정리와 대청소와 대대적인  정리를 했다. 부엉이 둥지 속을 비워내는데, 본인 것은 아까워 차마 못 버리니까 상대방이 과감하게 나서서 처리를 해야 했다. 그러다 다시 눈에 띄면 다시 주워 들여놓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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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수류탄이라고 적혀 그냥 버렸던 동그란 통이 보스코의 눈에 띄어 열어 보고선 빵기가 어렸을 때 받았던 새뱃돈이 빳빳한 새 지폐로 무려 5만원이나 들어있기도 했다. 옛날 화폐여서 값이 꽤 나갈 거라는 차사장의 평도 있었다. 언젠가 선물 받아 고이 간직했던 닥스 손수건도 몇 장 찾았다. 버려야 할 것은 못 버리고 간직할 것은 버리는 평상시 내 멍청한 모습을 되풀이한 셈이다.


벽에 못을 박아 사진을 걸고, 다락방 창가에 의자와 탁자를 배치하여 찻집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일층 골방에서 꺼내 마당에 던져 버린 정리장을 다시 들고 올라와 벽에 고정하고서 빵기와 빵고의 어린 시절 앨범과 성적표와 시험지,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정리했다. 두 아들의 어린 시절이 남긴 유물들이다.


보스코가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어머니의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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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낡은 손지갑 하나! 헌겁도 종이도 가죽도 아닌 낡은 손지갑 하나를 꺼내든 보스코가 내게 묻는다. '이것도 버릴까?' '그게 뭔데요?' '울 엄마 지갑' '그건 절대 안 되죠. 어머님 유일한 유품인데' 지갑 안에는 어머니 도민증 사진 네가티브와 69년도에 보스코가 막내동생 훈이에게 보냈던 편지 석 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열어보니 가난한 형제들이 학업과 실생활을 헤쳐나가며 격려하고 위로하던 애틋한 사랑과 염려가 절절히 쓰여져 있었다.


고아로 남겨진 4형제가 그래도 다들 저렇게 잘 살아남았으니(둘째는 3년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성모님의 도우심이 크다. '여보 그 안에 다이아 알 반지라도 큰며느리 주시려 감춰 두셨나 잘 찾아와요.' 그는 껄껄 웃었다. 지갑 속이 아니라 지갑을 들고 있는 보스코, 지금 여든 두 살의 저 남자가 우리 시어머니가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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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에 옥련씨가 잠깐 들려 집 고치는 상황을 돌아보고 갔다. 지금 이 나이에 집을 고치면 20년은 갈 터이니, 아무리 백세 시대라도 더 힘 빠지기 전에 고치게 되어 다행이라며 격려하고 갔다.


우이천 일대에 벚꽃이 흐드러지자 어제 도봉구청에서 한일병원 앞 개천에서 빛의 축제를 한다는 방이 붙었다. 우리 동네 밤마실을 오라고 한목사에게 전화를 했다. 조황조라는 가수가 노래를 하는데 동네 아짐 동네 아찌들이 몰려와 밤하늘 벚꽃나무들을 찬란하게 비추는 조명에 맞춰 흥에 겨워 동네가 떠나간다. '나는 또 BTS 라도 온 줄 알있네!' 했더니 한목사 왈, ‘몰라도 너 너무 모른다. 그런 건 올림픽 경기장에서 하는 것이고, 조황조도 나름 잘나가는 국민가수란다. 이런 데선 트로트 아니면 안 돼.’ 


친구를 마을버스로 보내고 보스코랑 아이스바 하나씩 물고서 살랑대는 봄바람에 찬란한 꽃길을 걸었다. 행복이란 소소한 것. 꽃잎이 휘날리는 밤길을 함께 걸으며 서로가 건재하다는 걸 느끼는 일이려니... 큰 수술을 치르고도 이렇게 다시 봄을 맞고 새로 피어난 꽃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의 기도에 심장이 터질 듯하다.


보스코의 주일복음 단상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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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가지 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는 성지주일이고 성주간 첫날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어 인간들의 손에 가장 비참한 처형을 당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생생한 날이다. 인생고(人生苦), 그것도 가장 잔인하고 극단적인 형태로 자기 몸에 받아들여서 내놓은 하느님의 해법이 참으로 오묘하고 또 아연하다. 부처님의 열반에 드신 미소와는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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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고난회 '명상의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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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카타리나씨가 왔기에 옥련씨의 초대로 점심을 함께 했다. 그미의 절친인 노아네스씨도 보스코를 보고 싶다 해서 함께 식사를 하고, 옥련씨가 일요일 오후마다 무급 알바를 뛰는 우이동 명상의 집에 가서 커피를 들었다. 이 찬란한 봄날 벗꽃이 흐드러진 북한산 기슭에서 차를 마신다는 뿌듯함, 삶이 고마운 이유(gracias a la vida)의 목록이 갈수록 두꺼워진다.


내가 젊었을 때 한동안 매듭에 정신을 팔던 때가 있었다. 그때 매듭 재료를 많이 샀는데 더는 할 일이 없어 다락에 두었다가 바오로딸 모데스타 수녀님께 혹시 필요하신가 전화를 했다. 혜화동 공동체 '혜화나무'에서 공방을 하면서 필요할 수도 있다고 해서 오늘 오후에 가져다 드렸다


옛날 옛적로마에 살 때 명소에 가면 기념품으로 열쇠 고리를 사모은 적도 있었다열쇠고리도빵기가 인도에서 사왔던 목걸이 싸구려 소품들(그곳 가난한 아이들 손길을 뿌리치지 못해 사들였으리라)도 임자 있을 때 아낌없이 드리기로 했다. '혜화나무이순규원장 수녀님과 열한 사도의 공동체구석구석이 모두 아름다웠다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다 빛을 잃을 때 한때 그것들을 귀하게 사랑했던 기억만 사람을 미소 짓고 행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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