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19일 일요일. 맑음


강남까지 내 차로 운전해 다니는 일은 무던한 참을성을 필요로 한다. 25 Km2시간에 간다는 건 어느 면으로도 불합리하다. 그래서 네 번을 갈아타더라도 지하철을 택한다. 지하철을 타면 우리집이 종점(우이선)에 가까워 앉아갈 수 있어 책을 보기도 하고 로사리오 기도도 할 수 있다. 가끔 졸기도 하고 사람 구경하는 일도 재미있다. 무엇보다 다리와 허리가 멀쩡하니 안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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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치과 선생님은 내 이를 뼈에 박으며 아직도 미안해 한다. 보통은 잇몸 뼈가 물렁뼈여서 꾹 눌러 나사를 돌리면 들어가는데 내 뼈는 워낙 단단해 드릴로 구멍을 파고 거기다 기둥을 돌려 박는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끝났을 일을 두세 배 시간과 고통을 주니 미안해 하는 게 당연한데, 내 아들이 저 의사라면 맨날 썩은 이만 들여다보며 쩔쩔매는 신세가 얼마나 안쓰러울까?


오른쪽 맨 끝의 아랫니라서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공사를 하는데 의사도 환자만큼 힘들어 한다. 아무튼 임플란트 기둥은 박아 넣었고 항생제와 소염진통제도 착실히 챙겨 왔다. 제발 더는 다른 일을 만들지 말자. 예쁘기는 내 치아가 하얗고 가지런하여 보기좋은데 보스코는 뻐드렁니이면서도 튼튼하기만 해서 되레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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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꼬맹이가 쉬는 토요일을 우오방’[우이동 오인방] 만나는 날로 했다. 나는 서울에서 한목사와 함께 부천으로 갔다. 보통은 여자들 모임에 안 가려는 보스코이지만 딸들 본다고 앞장선다. 그렇게 살뜰하게 딸들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으니 어떤 왕자님이 부럽겠는가?


순둥이가 마련한 점심을 먹고서 순둥이네 집에서 커피와 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오만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당신은 본당 사목 경험이 전무했다면서, 우리 대모님은 늘 공부만 하고 강의만 하고 해외선교만 해 와서 본당 사정이나 세상사에 대해서는 우리더러 고수라며 무료강의를 듣는 기분이라 하신다. 한꺼번에 너무 집중 교육을 시키면 체증이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80이 넘은 나이니 이해 못하실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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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리는 집에서 (큰 수술 받은) 여동생의 생의 귀환 파티 준비로 먼저 자리를 뜨고, 나머지는 4시가 넘어서야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정릉에 들러 한목사를 집에 내려주고 우이동으로 왔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의 친구와 오늘까지도 단짝 친구로 가까이서 함께 지낼 수 있으니 나는 겁나게 재수가 좋은여자다.


오늘 사순 제 4주일은 기쁨의 제대에 분홍색 꽃도 피었고 신부님도 어여쁜 핑크색 제의를 입으셨다. 사순절 중이라도 좌절하지만 말라고, 그분이 계시는데 우리는 기쁨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 같다. 죽음에서도 부활하셨으니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려니.... 구원의 기회가 와도 종교인들의 맹목을 여실히 드러내는 '소경의 치유' 일화가 뜻깊다.


보스코의 주일복음단상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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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박정희 군사반란과 독재, 전두환의 군사반란과 광주사태에서도 견뎌낸 국민 아닌가! 윤석렬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지만 좌절하지 않으면 우리가 승리한다는 확신을 스스로에게 일깨운다.


요즘 3층 다락을 정리하며 문익환 목사님의 땅의 양심이라는 액자를 발견했다. 35여 년 전 1987년 인도의 예수회 해방신학자 사무엘 라얀 (Samuel Rayan 1920~2019) 신부님이 한국 방문 중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문익환 목사님과 박용길 장로님도 함께 초대한 일이 있었다. 사진을 보니 그날 여성신학의 정현경 교수도 왔다. 그날 박장로님이 오시며 그 해 문익환 목사님이 감옥에서 쓰신 시를 받아 붓펜으로 써다 선물로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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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문익환 목사님, 박용길 장로님, 라얀 신부님(전호천, 빵고와 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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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님 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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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내가 표구를 배운 터라 그걸 표구해서 갖고 걸어 놓았다가 집수리하면서 다락으로 올라가 잊고 지냈다. 문목사님의 '통일에 집'에 그 작품(남편의 옥중시를 아내가 깨알글씨로 써 놓은 순애보(殉愛譜) 아닌가?)이 없다기에 기증을 하겠다니까 오늘 오후 문목사님 따님 문영금 선생('통일의 집'을 관리하고 있다)이 그걸 가지러 빵기네집엘 왔다.


그날 함께 했던 사람들의 사진이 있었다는 기억만 있었는데, 마침 오늘 저녁 호천네집에 갔다 35년전 그날 호천이가 운짱으로 봉사했던 기억이 나서 사진을 찾아보니 내가 찾던 바로 그날의 그 사진들이 나왔다. 어찌나 반갑던지!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람들에 의해 보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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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던 시절에도 감옥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투신했던 분들 덕분에 지금이나마 우리가 있다. 좌절 말고 서로를 일으켜 세워 바른 일을 하는데 두려움 없이 하자. 학창시절 그 가난했던 신학생들과 함께 박봉으로 그만큼 가난했지만 우리를 바르게 가르쳐 주셨던, 김재준, 문동환, 문익환, 안병무, 김정준, 이우정,.. 선생님들 그분들이 몹시 생각나는 날이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저들은 허깨비에 불과합니다"(2015.1.1.)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27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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