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년 12월 28일 월요일, 날씨 흐림

 

날씨가 몹씨 춥다. 모두들 몸을 웅숭거리고 모자를 쓰거나 코트를 입고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걷는다. 아무도 눈에 안 보이고  각자의 냉기 속에 빠져서 자기 발끝만 생각하는 모습들 같다. 노인들은 미끄러져 뼈라도 부러질 세라 집밖에 볼 수 가 없다. 더구나 눈이 내려서 녹다가 다시 얼기 시작하는 인도위를 걷는 사람들은 그 긴장이 공포에 가까운 표정들이다.

 

그래서 내가 나선 오늘의 서울 거리는 한산하기보다는 살벌하다. 사람 옆에 사람들이 서더라도 그게 사람 아닌 물건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정말 서울에서는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빼고는 하릴없이 누구를 만나는 일도 없다. 다들 자기 세계에 담쌓고 빠져들어 밖으로 통하는 문은 만들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는 분위기다. 탈출하고 싶은 세상이다. 내가 지리산에 정착한지 두 해 밖에 안 되는데 서울에 올 적마다 벌써 이런 소원감을 느낀다. 정태춘의 노래말마따나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텅빈 거리를 생각하며" 숨이 막힌다고 할까?

 

아침 저녁 함께 부부가 성무일도를 할 수 있어서 참 좋다

DSC09344.jpg

 

오랫 만에 동대문에 나가서 한국염 목사를 만났다. 이주여성인권센터(약칭이 "이여인터"여서 더 예쁘다.) 대표이며, 남편 최의팔 목사가 시작한 외국인 노동자 인권센터에서 여성부분을 도맡아 여성이기에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외국인 여성들을 돕고 있다. 나와는 대학 동기로 늘 가까이 지내다 보니 나도 그녀가 하는 일에 이사를 맡아 함께하고 있다. 자기는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타인을 위하여 전적으로 투신하며 사는 이 부부를 보면 서울에도 높다란 벽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 새에 통로를 만들어가는 훌륭한 의인들이 많음을 절감한다.

 

한목사의 아들 한솜이는 우리 빵고와 친구이기도 한데 어려서부터 특이한 인생여정을 찾아 헤매고 있으며, 요새는 식생으로 병을 고치는 일에 흥미를 쏟고 있단다. 사람들이 병고에 시달리다 그 젊은 의원을 찾아오기 시작한다고 들었다. 그집 딸 꽃솜이는 딸이 없는 내가 부러울 정도로 씩식하고 즐겁게 살면서 주변을 밝게 만든다.

 

카나다에서 다니러 온 상옥씨도 함께 만났다. 오래오래 해 오던 사업을  이제는 접고 서울과 카나다를 오가면서 한가로이 사는데 늘 따스한 미소와 마음씨로 친구인 우리들을 덥혀준다. 오늘은 지하철을 거꾸로 타고오다 보니 약속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하였다. 서울에 가끔 오는 나도 전철을 타면 땅속이라서 북쪽으로 가는지 남쪽으로 가는지 헷갈린다. 카나다처럼 조용하고 여유로운 땅에서 살다가 가끔 고국에 들르면 그니는 눈이 팽팽 돈단다. 그니의 표현을 빌자면 "카나다는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다." 그니의 큰아들은 한국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카나다에서 공부 중이다.

 

전순란, 이상옥, 한국염목사

P091228005.jpg

 

미우니 고우니 하던 남편만 그래도 "젖은 낙엽"의 처지로라도 안 쓸리고 그니의 정원에 남아 있다. 그래도 우리 보스코처럼 "운동화 바닥에 붙은 껌"(이문자 선생의 표현)이라는 말까지는 듣지 않는다.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만들어 먹고 챙겨먹고 해서 아내가 삼사일 정도는 집을 비우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단다. (보스코의 경우, 하루만 지나면 주변의 모든 여성들이 그를 안타까워할 정도로 "와이프-보이"의 티를 낸다.)

 

그런데 지난번 상옥씨가 그 자유롭던 며칠을 지내고서 집에 돌아가보니 카펫 바닥을 몽땅 들어내고 나무로 바닥을 깔았고, 벽의 커틴을 모조리 뜯어내고 희한한 천을 둘러놓았더란다. 말하자면 엄마가 나갔다 들어와 보니까 설탕그릇 깨놓은 아이들과 매한가지란다.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게 삼사십년 살을 부비고 살다보니 "이쁜 것도 미운 것도 한 곳에서 나오더란다." 인생의 바닥을 들여다 본 지혜로운 표현이다.  

 

우리는 최의팔 목사가 쉼터 운영을 위해 커피를 볶아서 판다는 서대문의 "가베마루"라는 커피집에서 한참이나 수다를 떨다가 갈치백반을 먹고서 한층 더 싸늘해진 저녁 바람을 맞으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헤어져 가면서 그니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제 저녁 텔리비전에서 잠깐 스쳐 들은 한 마디를 낄낄거리면서 무슨 대단한 유모어라도 되는 듯 몇 번이나 내게 들려준 보스코의 심술을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문학팬: "선생님, 어쩌면 그렇게도 여자를 잘 알고 잘 그려내세요?"

소설가: "부인, 저는 남자라서 여자를 잘 압니다."

문학팬: "어떻게 아시는데요?"

소설가: "남자한테서 이성과 책임감을 빼놓고 나면 그게 곧 여자거든요."

 

                                                                               눈이 내리면 보스코의 낙서가 따른다

DSC09345.jpg 국염씨는 최목사가 충주에 문상 갔으니 빈집으로 들어갈 테고, 상옥씨는 "아내가 들어와도 뒤도 안 돌아보면서 텔리비전을 끌어안고 있을" 남편의 뒷모습을 찾아들어가겠지? 그럼 나는? 집에 오니 보스코는 송총각이 일찍 들어와 차려준 저녁을 먹고 여전히 컴퓨터 책상 앞에서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의 그 대단한 이성과 책임감이 무엇인지 결혼 36년이 지나서도 내게는 아직 전혀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보스코가 창밖 테라스에 모처럼 내린 사락눈에다 해 놓은 낙서는 싫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