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27일, 일요일 오후에 싸락눈이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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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 깨끗이 뒷정리를 하고서 잠들었으므로 아침에 일어나서도 기분이 좋았다. 11시 주일미사에 가면서, 우리는 미사에 참례만 하면 되지만 하루 건너 대축일을 연달아 맞는 신부님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4일 성탄 전야미사, 25일 성탄절 대축일 하루 종일 미사, 27일 주일 미사, 그리고 31일밤의 송년미사에 1월 1일은 한국에서만 의무축일이어서 하루종일 미사들 드리고 강론을 해야 한다. 그리고 곧 이어 1월 3일은 다시 주일이다. 모든 사제들에게 그야말로 "대목"을 보면서 무지무지하게 고생을 해야 하는 계절이다. 미사 후에 혜선엄마네를 보았다. 손자 둘을 데리고 성당에 나왔는데 너무 행복한 표정이었다.

 

미사를 드리는데 보스코의 발이 눈에 들어 왔다. 또 예의 그 수면양말(그는 그게 편해서 "훌러덩양말"이라고 부르면서 집에서는 즐겨 신는다.)을 신은 채로 미사에 온 것이다. 아침에 그 양말을 신으면서 "또 이 양말 신고 미사에 가면 안 되는데..." 라는 DSC09320.JPG 혼잣말까지 했는데 말이다. 지난 11월 2일 위령의 날을 맞아 담양에 있는 살레시오  은사들의 무덤도 성묘할 겸 담양 천주교 묘지에 미사드리러 갔었다. 미사후 최창무 대주교님의 초대로 주교님들과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보스코가 신을 벗자 그의 "훌러덩양말"이 바로 내 눈에 들어왔다. 분홍색 훌러덩 양말을 신은 전직대사의 차림을 상상해 보시라. 그런 실수를 오늘 또 한 것이다. 내 실수이기도 하다. 미사에 오기 전 골덴 셔츠에 영국제 체크무늬 넥타이로 내 딴엔 멋지게 코디를 해 주었는데 그의 발을 미처 못 본 것이다. 앞으로는 외출마다 그의 "용의검사"를 더 철저하게 해야 할 것 같다. 혼자 두면 잠옷 차림으로 동네를 나돌아다닐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리 철학교수라지만 그렇게나 조심이 없을까?

 

점심 후 차 한 잔 하자는 내 초대를 받고 아랫동네에 사는 오빠와 올케가 올라왔다.  오빠는 워낙 "이빨"이다. 전씨 집안에 말 못하는 사람은 없지만 오빠가 큰아들답게 단연 구변이 세고 독점적이고 가차 없어서 우리 형제들이 그렇게 부른다. 누구든지 그의 "이빨"에 걸리면 뼈도 추리기 힘들었다.

 

올케언니랑 하나 있는 아들 때문에 어지간히 속도 썩고 맘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때마다 상대방에게 탓을 돌리는 통에 어지간히 깊은 상처들을 안고 있는 식구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가 심장도 안 좋고 혈압도 있고 당뇨기가 있어서 검사를 받았다는 둥, 난생 처음으로 자기 건강을 걱정하는 말을 내 앞에서 하는 것이었다. 의외였다. 생전 병원에를 안 가는 사람이 말이다. 말투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교과서 내지 사전적인 그의 훈시(절대로 틀린 말은 아니다)는 듣는 사람 모두를 숨막히게 하고 남았는데 말이다.

 

오늘 그의 말씨는 완전히 달관한 도인 같았다. 나는 속으로 "아, 역시 사람은 변하는구나." 하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가출을 거듭하여 고등학교 때는 3년간을 두고 삐끼. 권총잡이(주유소), 노숙자 등 안해 본 것이 없는 아들 때문에 자기는 철학자가 되었노라고 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악처 덕분에 철학자가 되었듯이, 공자가 악처가 싫어서 천하를 주유하는 사상가가 되었듯이, 자기는 아들 덕분에 세상을 알게 되었고 사람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자기 친구한테 했던 말을 내 앞에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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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처럼 뻑하면 집 나가는 놈 기다려 봤어? 너, 나처럼 아들놈이 사고 쳐서 야밤중에 경찰서에서 전화받고 후닥닥 달려가 봤어? 너, 나처럼 공고 간 놈 5년간 학비 대 봤어?  너, 나처럼 일년에 몇 번씩 공고선생들 찾아가서 굽신거리면서 밥 사 봤어? 너도 그렇게 돼 봐라! 철학자 안 되고 배기나!" 그 말을 듣고 보니 로마에서 살 적에 올케한테서 받았던 전화가 생각났다. "고모, 나 성공했어요. 우리 애가 드디어 군에 입대했어요! 축하해주세요!" 모두를 자식들 병역을 기피시키려고 수천만원씩 들여가면서 눈이 벌건 세상에 아들이 군 입대한 것을 축하받고 싶을만큼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은 부모에게 절실했던 것이다.

 

그러던 아들이 전문대 조리학과를 (비록 무지무지 늦깎이지만) 당당하게 졸업해서 지금은 경주의 어느 큰 호텔 주방에 정식 직원으로 의젓하게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오빠도 이제는 아이의 성향과 취미와 그릇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른 듯했다. 지금 아들의 처지와 그의 건강한 몸과 그의 소심하지만 그런대로 만족하는 직장생활을 두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 절절하단다.

 

DSC09340.JPG   "애비의 능력으로 좋은 자리로 옮겨 줄 수 있는데도 본인의 능력도 안 되는 터에 맘 고생 하느니 맘 편하게 자기 몫만큼 살겠다는 겸손한 삶이 좋지 않느냐?" "지금 청년 실업자가 80만명인데 봉급이 얼마든 제 밥벌이 하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건강한 몸 주신 것도 고맙고, 착해서 자기 밥그릇 빼앗기면서도 '배는 좀 고프지만 오늘 못 먹으면 내일 먹지 뭐.' 라면서 속편해 하는 아들을 둔 게 고맙기만 하다." 오빠에게 일어난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다. 이제는 아들을 아버지의 욕심대로 닦달하는 일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마음에 이른 것이다. 역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오빠의 더 놀라운 말은 내 삶에 대한 오빠의 평가였다. "성서방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50퍼센트는 순란이 너의 공이다. 그러나 그런 수완과 능력을 받은 걸 하느님께 감사하고 열심히 계속하되 그렇지 못한 사람을 절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오빠에게서 처음 듣는 칭찬일 뿐더러 그만 못한 사람을 비난하지 말라는 충고는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오는 논리였다. 무능하고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인간은 그의 안전에서 여지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관된 그의 인생관이었던 까닭이다. 정말로 오빠가 이제는 삶을 달관한 철학자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빠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한 마지막 한 마디는 오늘 대화의, 그야말로 하일라이트였다. "나 퇴직하면 신학교 가서  목사라도 해야 할까 보다. 모든 게 감사할 뿐이거든..." 대문을 나서는 오빠의 어쩌면 달관하고 그래서 어쩌면 홀가분해진 어깨 뒤로 모처럼 내리는 사락눈이 하느님의 손길처럼 오빠를 감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