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26일 토요일, 날씨 흐림

 

 

        3층 다락방에서 내다본 삼각산(북한산). 모처럼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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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스테파노 축일이다. 아침기도를 하다 보니 우리 주변의 스테파노라는 이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금년 2월에 돌아가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 보스코의 유학시절, 독일 주교회의 산하 MISSIO에 장학금을 신청하는  서류에 교구장 추천 사인을 해 주셨다. 로마에 있는 우리 집도 방문하셔서 가난한 유학생의 저녁대접도 응하셨다. 내가 우리밀 공동대표 시절 명동성당 광장에서 행하는 우리밀 홍보사업은 꼭 둘러보셨고, 당시 불면증으로 쑥뜸을 받고 계시던 추기경님은 당신 이마에 까맣게 탄 자국을 내가 손가락으로 만져보아도 응석을 받듯이 잠자코 웃기만 하셨다. (보스코의 칼럼집"가장최근칼럼" (6)에는 지난 3월 1일자 가톨릭신문에 보스코가 쓴 김추기경님 추모글이 실려 있다.)

 

스테파노 콜롬보 신부님. 1997-98년 로마에서 안식년을 보낼 적에 성갈리스도 카타콤바 살레시오 수도원장 신부님으로 그분은 보스코에게 수도원의 커다란 서재를 내주셔서 2년 동안 보스코가 편하게 집필활동을 하게 도와주셨다. 아프리카에 다녀오실 적에는 내 목걸이를 선물로 사오실 정도로 자상하셨다. 우리의 결혼 25주년 행사와 잔치를 성대하게 치러주셨다. 안식년을 끝내고 떠나올 때는 어떤 성인의 유해가 담긴 목걸이를 선물해 주시면서 작별을 아쉬워하셨다. 지금은 토리노에 있는 살레시오회 본원에 계시다.

 

교황의 스위스 근위병 스테파노 디 크로체. 한국 처녀를 사귀던 이 멋쟁이 장교는 보스코가 교황청에 들어갈 적마다 자동차에 달려와서 "대사님, 대사님" 하면서 우리말로 인사를 하였고 때로는 관저에까지 인사를 오곤 하였다. 2007년에는 여친을 만나러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다. 그 여친과 결혼을 성사시켰는지는 모르겠다. 근위병 장교가 결혼을 하면 아파트를 교황청이 제공한다.

 

지리산 도정의 김스테파노씨. 사람을 무척 좋아하고 손님대접에 극진한 호인. 그가 빠지면 "지리산 멧돼지들"(문정의 등산클럽 이름)의 산행은 여간 풀이 죽고 싱거워질만큼, 그는  "웃음의 생산자"다.... 그리고 당장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스테파노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로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때려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죽은 성인께 우리를 위해서 빌 것이 많았다. 

 

손님 오는 날은 마음부터 바쁘다. 청소를 하고(보스코의 몫), 테이블 꽃, 그리고 저녁식사이니까 촛불도 밝혀야 한다. 보스코는 은사 신부님과 친구 신부님들이 오신다고 오늘은 기꺼이 테이블 세팅을 하였다. 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크리스마스 테이블보에 수놓은 헝겁 냅킨을 쓰고 그릇 밑에는 은쟁반 밭침을 깔고 나비 손뜨게 깔개도 깔았다. 은쟁반은 일년에 겨우 몇 번 쓰는 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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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홈플러스에서 장을 보았지만 오늘도 준비하다 보니까 빵도 모자라고 전식에 쓸  양상추, 적채, 방울 토마토도 빼먹었다. 이럴 때 심부름하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좋을 텐데... 이층에 있는 보스코에게 부탁할까 해서 올라가 보니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그래, 일하는 남편 성가시게 해서는 안 되지..." 하면서 내려오다 보니까 내가 더 성녀가 된 기분에 우쭐해진다("정말 난 넘넘 착해"). 로마에서 열 명쯤 귀빈을 초대하면 우선 부엌에 조리사 로사, 설겆이하는 아이샤, 돈주고 불러오는 서비스맨 2명 등의 일손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파출부 하나 부를 생각을 않고 나 혼자서 기고 날고 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6시에 우리집 치과 주치의 곽선생이 남편 서교수(서울치대)와 DSC09310.JPG 정인이와 함께 도착하였다. 정인이는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는데 키가 훌쩍 커서 멋진 총각이 되어 왔다. 생각하는 것도 꽤 어른스럽고 "엄마의 잔소리가 무척 싫었는데 혼자 사니까 엄마의 잔소리가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라고 한다. "그래선지 집에 오니까 그 잔소리가 반가웠는데 딱 하루뿐이었다. 그 담에는 전과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제는 적응하고 타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꽤 철이 든 얘기도 곧잘 하였다. 서교수는 아들의 그 의젓한 모습에 마음이 든든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하고 바라본다. 식사후에는 어른들의 지루한 얘기에 정인이가 헝겊 냅킨을 조물락거리다 핸드폰 구석구석을 닦고 "다음엔 그걸로 구두를 닦을 작정이니?"하고 내가 묻자 화들짝 놀라기도 하여 아직도 아이 모습이 보여 여전히 사랑스럽기도 하였다.

 

DSC09309.JPG 빵고도 왔다. 부모와 성탄 만찬을 하고 와도 좋다는 원장신부님의 허락이 있었나 보다. 오랫동안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을 도맡아오신 도요한 신부님(미국인으로 한국에 오신지 딱 50년 되셨다), 또 오랫동안 교도소 사목을 하다 지금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서 노동사목에 종사하는 김정수 신부님, 연변에서 학교를 경여하다 돌아온 권신부님(미국인)도 오셨다. 김정수 신부님이 집을 잘 못 찾으셔서 빵고가 나가서 모시고 들어왔다.

 

           오른편에서부터 김정수 신부, 권신부, 그리고 보스코의 은사 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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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신부님은 보스코의 은사이실 뿐 아니라,  특히 찬성이 서방님의 은인이시고(보스코 홈피의 칼럼집에서 "성염 교수의 살아온 이야기"  네번째 꼭지  "주님께서 너에게 잘 해 주셨으니"에 그 내력이 나온다.) 오늘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도 "30년전에 내가 이 집에 와서 저녁식사를 했는데 그날 밤에 보스코가 KCIA(중앙정보부)에 잡혀 갔지."라고 과거 일을 상DSC09318.JPG기시켜 주기도 하셨다.(이 얘기는 같은 글의  다섯째 꼭지 "여인 중에 복되시다뇨?" 에 나온다.)  김정수 신부님도 유신시대에 살레시오 수사이면서도 2년간 감옥살이를 하신 분이다. 권신부님은 로마에서도, 여기서도 우리와 각별히 친한 사이다.이렇게 반갑고 좋은 분들과 일년에 한번이라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기쁨은 혼자서 바쁘다고 엄살하는 모든 수고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DSC09307.JPG 곽선생은 우리 가족 전부의 치아를 책임지는 주치의다. 오늘도 얼마나 재치있게 내 일손을 돕는지 도우미 열 명이 부럽지 않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이다. 식사후에도 설거지를 해 주어 손님들이 다 간 다음에 컵과 큰 그릇만 씼으면 되었다. 치우는 일이 하도 많아서 보스코가 "우리 그릇 다 씼었으니 이대로 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정리하면 안 될까?"라고 한다. 그는 "내일 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오늘 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그 대신 나는 "오늘 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는 철칙을 갖고 있어서 "내일은 또 내일 할 일이 있다."면서 그를 재촉하여 뒷정리를 마쳤다. 잠자리에 들면서 시계를 보니 12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