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21일, 월요일, 날씨 맑음

 

크리스마스를 지내러 서울로 왔다. 우리 차는 서울에서 지리산 갈 때도, 지리산에서 서울 갈 때도 한결같이 짐차다. 그래서 두 아들도 "엄마는 우리 차가 일톤 트럭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라느니 "나중에 취미생활 하시라고 고물트럭을 사드리자."느니 하면서 엄마를 놀렸다. 첫차 엑셀을 탈 때도, 그리고 마티즈를 탈 때도, 지금 NF 소나타를 탈 때도 짐의 양은 변함이 없다. 마티스 뒷좌석의 절반을 짐으로 채우고, 절반 좌석에 두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서 발밑과 무릎에 짐을 얹고서 짐짝처럼 지리산을 오가던 것이 오래 되지 않았다. 두 아들은 이미 그런 고문에서 벗어났는데 도망갈 데 없는 보스코만 아직도 짐과 동거동락한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내 인생의 좌표가 있다. "빈 차로는 가지도 않고 빈 차로는 오지도 않는다!" 보스코는 그때마다 짜증을 내면서 "짐 좀 줄여라, 짐 좀!"을 외치지만 그에게는 발언권만 있지 집행권은 없다. 그는 운전을 할 줄 모르고(= 죽어도 운전을 하지 않으려 하고) 운전을 하는 사람은 나니까(= 대전-통영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서울에서 지리산까지 5, 6시간이 걸렸는데 운전은 시종일관, 지금처럼,  나 혼자서 했다). 더군다나 소나타 트렁크에는 짐이 어지간히 많이 들어간다. 오늘도 트렁크에 가득 싣고, 뒷 좌석과 바닥에 의자 높이로 짐이 가득하다.

 

고속도로에서 바라본 덕유산의 눈. 지리산만큼은 오지 않았다

DSC09213.JPG

 

갖고 가는 모든 짐에는 사연이 있다. 그 짐이 서울 가야 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오늘 내가 보스코에게 설명한 구실을 열거해 본다.

 

-.동치미 한 통 = 아래층 총각 먹을 것

-.동치미 큰 통 =: 오빠네, 호천네, 두상이서방님네 먹을 것

-.동치미 통 또 하나 = 파비아노 선생님의 특별선물  

("우리집 남자 형제들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부터 동치미를 맛들였다! 올케들은 예전의 맛을 못 낼 뿐더러 아예 담지를 않는다! 두상이네 동서는 결혼하자마자 시부모님 치매증세로 어려운 시댁일을 도맡았으므로 두상이서방님은 시댁에서도 뭔가 혜택이 있음을 아내에게 보이고 싶어한다! 이 동치미는 단지 입맛을 돋굴 뿐더러 여러  부부들의 금슬에도 이바지한다! 파비아노 선생님이 주신 것은 그분의 성의로 보아서도, 남자로서 김치를 담그고 선물까지 하는 그분의 여성적 자상함을 존경하는 뜻에서도 서울에 반드시 가져가야 한다!")

 

-.김치 한 통 ("이문자 선생님이 내 김치맛을 꼭 보고 싶어한다! 여신학자협의회 바자 때마다 내 김치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김치 큰 통 ("아래층 송총각도 먹어야 하고 우리가 서울에 머무는 한 주간도 먹어야 한다. 가져가면 내가 먹느냐, 당신이 먹느냐?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나더러 거두라고 하느님이 맡겨주신 사람들이다!")

 

내가 서울 가는 내내 옆에 앉은 보스코에게, 자동차 속에서 왜 김치냄새가 팍팍 풍기며, 왜 동치미 통을 세 개나, 김치 통을 두 개나  싣고 가는지 설명하는 거창한 명분이다.

 

-.고구마 한 상자 ("지리산 집에 세 상자나 되니 송총각에게도 갖다주어 먹게 해야 한다. 당신 배를 봐라! 아침마다 빵이나 빠다를 먹을 것이 아니라 세룰로이즈가 풍부한 고구마를 먹어야 뱃살도 빠지고 오래오래 장수할 게다.")

-.고구마 한 봉지 ("고구마가 아니고 야콘이다, 야콘! 비타민이 최고고 당신 콜레스테롤 낮추는 특효약이다. 서울에서 아침마다 당신 먹일 참이다. 안 그러면 당신은 항상 단것만 찾지 않느냐?")

-.감자 한 봉지 ("이번에 손님 치를 것이다. 안 가져가면 사 먹어야 한다. 그 속에 들어있는 양파는 26일 손님치를 것이다. 손님 초대 누가 했느냐?")

-.사과 한 상자 ("당신 눈으로 보지 않았느냐? 강영숙씨가 성탄 및 새해 선물로 준 것이지 않느냐? 이걸 서울 가지고 가면 누가 먹느냐? 당신이냐? 나냐? 아침에 사과 한 알이면 의사가 집에 얼씬도 못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팥 삶은 앙금 3병, 찹쌀가루 한 봉지 ("동짓날 저녁 쉼터 식구들 헹가레에 소집해놓았다. 그들과 한 해를 돌아보면서 위로를 해 줄 텐데, 당신은 크리스쳔으로서 그런 선의도 이해를 못하느냐? 새알 팥죽 좋아하는 사람 누구냐? 먹는 당신이냐 만드느라 죽어라 고생하는 나냐?")

-.아이스박스 중형 ("그 속에 들어 있는 것 모두 손님치를 음식들이다. 그리고 당신 먹을 홍삼달인 물이 세 병이다. 수삼 사다가 여덟번 쪄서 말려서 달여서 아침마다 지성으로 당신한테 갖다 바치는 사람이 누구냐?")

-.새송이 버섯 두 상자 ("성탄절 맞아서 동네사람들 만나면 뭘 선물하느냐? 모처럼 인심 좀 쓰는데 그렇게 짜증낼 테냐?")

-.포도 한 상자 ("26일 손님 올 때 쓸 것이다. 손님 초대 누가 했느냐?")

-.찹쌀 떡 한 봉지 ("당신 아침 식사다. 우리집에 "떡보영감"이 도대체 누구냐? 나는 찰떡만 먹어도 소화가 안 되어 고생이다. 오로지 당신을 위한 것이다.")

-.노트북, 책가방, 대형 책봉지 ([마침 잘 됐다.] "이 무거운 것들 누구것이냐? 당신 살림 아니냐? 내가 당신 책 챙기는데 이래라 저래라 하더냐?")

-.옷 가방 ("당신 작은 아들 줄 것들이다. 빵고가 성빵고냐, 전빵고냐?")

-.그리고 몇 개의 묵직한 다른 봉지들과 보따리 (이유를 댈 만하지 않은 것들)

 

이렇게 모든 짐보따리에는 서울 올 필연적인 사연이 있고 더구나 종교적이고 영성적이고 애덕적이고 신학적인 명분까지 끌어대면서 그것들을 꾸리고 챙기고 담고 싼 것은 다른 사람 아닌 나였음을 극구강조하면서 보스코에게 해 댄다. 그는 듣는지 마는지, 내 잔소리를 즐기는지 흘려듣는지 도무지 알쏭달쏭한 미소만 짓고 있다. 그런데 그를 대신하여 나에게 결정타를 먹인 것은 송총각이었다. 서울에 도착하니까 마침 집에 있다가 우리 짐을 들어다 집안에 옮겨준 송총각이 지르는 탄성! "차 한 대에서 이렇게 많은 짐이 나올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집에 와서 가져 온 짐을 다 정리하고서 마지막으로 종이봉지를 펼쳐 보니 보스코의 마플러가 3개 나왔다! 옷 가방에서는 그의 마플러가 무려 4개 나왔다! 서울집에 마플러가 없더라면서 자기 마플러들을 죄다 싸들고 온 것이다. 짐 많다고 푸념한 보스코에게 드디어 내가 쐐기를 박을 구실을 잡은 셈이다.("나는 왜 이렇게 착할까? 내가 생각해도 나는 넘넘 착하기만 해.") 

 

"바로 요것 때문에 자동차에 짐이 가득하지 않았겠나? 지난번 서울집에서 드라이클리닝한 양복들을 모조리 챙겨가더니 오늘 서울집 옷장을 열어보면서 겨울옷이 한 벌도 없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최소한 생각없이 이유없이 이렇게 옷 보따리들을 들고서 오가지 않는다. 다시 옷 보따리를 서울로 가져와야 하지 않느냐?" (마플러 7개 때문에 소나타 스프링이 휘었다고 말할까 했으나 내 생각에도 좀 너무한다 싶어 말을 아꼈다. 아, 역시 나는 넘넘 착하다.)

 

어제 일기에 기록한 보스코의 설명대로, 교육자로 태어난 여성으로서 내 학교 내 교실에 남은 유일한 피교육자에게 내가 실시하는 "집중교육"이 대충 이런데, 자화자찬과 공치사와 몰아세우기와 억지가 뒤범벅된 나의 집중교육이 보스코(전직 철학교수)에게 무슨 효과를 끼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