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19일, 토요일, 날씨 종일 흐리고 간간이 눈발 뿌림

 

진이엄마랑 재마스님이 찬바람 속에 집을 나선다. 이렇게 추운 날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잡밖엘 나가고 싶지 않다. 해는 간간이 얼굴을 내미는데 눈발이 흩날리니 비가 오면 "여우비"고 눈이 오면 "늑대눈"이라고 불러야 할까?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다.

 

손주 시아의 유아원 생일파티(스위스 제네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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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 26일에는 서울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해야 하고, 그 파티에는 라사냐(lasagna)를 준비해야 돼서 파르미쟈노(Parmigiano) 치즈를 잔뜩 갈았다. 서양에서 크리스마스에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나라 추석이나 설날처럼 온갖 교통지옥을 감수하면서 고향으로, 부모님 계신 집으로, 맏형이나 큰누나가 있는 집으로 모인다. 이탈리아에는 "성탄절은 집안으로! 부활절은 집밖으로!" 라는 속담마저 있다. 우리가 사귀는 쟌카를로 신부님은 집안이 12형제인데 성탄절에 초대되어 가보니(북이탈리아 트렌토에 산다. 로마에서 하루종일 달려가야 한다.) 부부로만 모여도 30명이 다 되는 식구들이 모두 함께 모여 있었다. 더구나 70대, 80대 나이의 형제자매들이 말이다.

 

그리고 옛 티롤 지방에 사는 그 집에서는 셀텐이라는 견과류가 잔뜩 들어가는, 과자처럼 딱딱하게 구운 케익을 크리스마스 절기 내내 두고 먹는다. 오가는 손님들과 나누기도 한다. 우리 문정 공소의 헤드빅 수녀님도 해마다 성탄절에 과자를 구워서 교우들에게 집집이 나누어주시는데 바로 그런 전통과 관습을 지금도 실천하시는 셈이다. 올해도 내일 20일 성탄절 미사와 파티에서 나눠주실 게다. 지지난 주일에 쿠키를 구우실 때 공소 여교우들이 여러 명 가서 배우고 거든 것으로 안다.

 

성탄절 같은 큰 축일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라사냐라는 음식을 먹는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올 때에 스파게티를 만들면 곧 퍼져버리기 때문에(푹 삶아지거나 퍼진 스파게티를 이탈리아사람들은 아주 싫어한다.) 미리 준비해서 오븐에 구워내는 라사냐를 즐겨 먹는다. 결혼식이나 은경축, 금경축 같은 때도 내놓는 잔치음식이다. 손이 많이 가고 만들기 복잡하지만 이렇게 많이 만들어서 냉동시켜 놓을 수 있어서 잔치 당일에는 급한 일손을 돕기도 한다. 금년에도 호천이댁이 조수노릇을 하면서 나를 돕기 때문에 힘이 반으로 주는 셈이다.

 

DSC09029.jpg 라사냐는 칼로 썰기전의 칼국수 반죽(밀가루를 물을 넣지 않고 계란으로만 반죽하여 만든다.)처럼 밀어놓은 것을 가로 20센티, 세로 15센티 정도로 잘라서 물에 삶아내면서, 깨끗한 행주에다 놓아 물기를 제거하고서 팬에 올리브유를 바르고 그 위에 반죽 익힌 것을 깔면서 켜켜에 도마도 소스와 화이트 소스를 얹고 팔미쟈노 치즈가루를 두툼하게 뿌리고 모짜렐라 치즈를 얹으면서 켜켜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일곱 켜 정도로 쌓아진 것을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먹을 때가 되면 오븐에 구워 식탁에 올린.

 

며칠 전 찹쌀을 물에 담갔다가 빻아서 며칠째 말리고 있다. 동짓날 새알팥죽을 보스코가 좋아하니까 죽을 쑬 셈이다. 오늘은 팥을 삶아서 체에 내려 놓았다. 넉넉하게. 22일 동짓날에는 "헹가레"에 쉼터 식구들을 불러 팥죽을 나누면서 한 해 무사히 지낸 얘기들을 듣고 싶다. 민석이엄마는 남편과 이혼하는데 성공하여(?) 이 음식점을 열어 지금도 그곳에서 장사를 하면서 아들과 둘이서 살고 있다. "쉼터"에 들렀던 사람들이 아직도 다들 어렵지만 씩씩하게 꺾이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들이 기특하다. 저렇게 의젓하고 살림살이 잘하고 생활력 강한 여자들을 왜 두들겨패고 박대해서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게 만들었을까? 우리나라 남자들이 얼마나 난폭하게 키워져서 그럴까? 그 남자들도 한국사회라는 폭력사회의 희생자들일까?

 

PC170278.jpg   오후에 빵기가 스카이프 전화를 해왔다.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손자 시아가 유아원에 안 가는 날이어서 화상통화를 하면서 손주 얼굴을 보고 즐거워하는 날이다. 아들이나 며느리는 우리 안중에 없고 오로지 손주 얼굴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 보고 싶어 안달하는지를 아는지 녀석은 한쪽 구석에 앉아 전혀 관심없다는 듯이 저 할일만 하고 있다. 애비가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드리라고 몇번이나 어르고 달래고 하니까 마지못해 화상 카메라를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그래, 시아 사춘기야!" 란다. 미운 세살, 하도 뻔질거리고 말을 안 듣기에 제 엄마 아빠가  "시아가 아마 사춘기인가 봐" 했더니만 그 말을 고깝게 알아듣고서 심통을 부리던 참이었단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도 이쁘기만 한 것을 보면 우린 "주책 할배 주책 할매"가 다 된 셈이다, 다행인 것은 빵기나 며느리나 그런 지경에도 시아에게 소리지르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이를 참 유하게 키워서 좋다. 어제는 유아원에서 앞당겨 시아 생일 잔치를 했단다. 시아는 세돐을 맞는다. 시아의 생일은 12월 24일, 성탄전야고 그래서 세례명이 임마누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