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5일, 화요일, 아침에는 흐리다가 오후에는 맑았음

 

눈송이들이 공중에 둥둥 떠다닌다. 내려앉았다가 다시 바람이 띠워주면 훌쩍 뛰어오르고 거꾸로 뒤집어지고 재주를 부리면서 날아다닌다. 아침 숫가락을 들고서 멍하니 눈송이들의 재롱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먼산은 하릴없이 눈앞에 오락가락하다 부옇게 흐려진다. 머리를 흔들어서 정신을 차리지만 내 눈은 다시 저만치 한길로 내려간다. 송전마을 들어가는 군내버스가 송문교에서 돌아서더니 시간 맞춤을 기다린다. 길이 얼어서 송전까지 들어갈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다. 송전 사람들을 생각하니 김용택 시인의 "칠보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가 떠올라 그의 시집을 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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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행버스는 그냥 지나가고

군내버스만 쉬는

칠보정류장에 눈이 내린다.

눈은 내리며 땅에 떨어져 녹고

울퉁불퉁 시멘트바닥의 잔돌들은

검버섯 핀 손등들처럼 차디차게 얼음을 뒤집어 쓴다.

그 위에도 눈이 내린다....

 

차를 기다려도 저 산모퉁이를 돌아오지 않고

이따끔 눈보라만 하얗게 몰아쳐 온다....

 

눈이 내린다.

칠보에 저렇게 오는 눈을 어쩌랴.

이제 이 차부에서는 그 무엇을 기다릴 것도

더 떠나보낼 것도 더는 없고 어둠만 스며든다.

할머니 한 분이 마지막으로 보퉁이를 끌어안고

어둡고 낮은 하늘 끝으로 눈이 되어 사라지고

하늘과 땅이 맞닿아 이 세상은 눈뿐인데

어쩌랴 저렇게 칠보에 오는 눈을

칠보가 어쩌랴

 

한 20분 서 있던 군내버스는 시간을 맞추었는지 슬슬 움지이며 송문교앞 빈터를 떠나서 함양쪽으로 떠나간다.

 

서재에서 꿈쩍도 않는 보스코가 뭘 하나 궁금해서 들여다보았다. 체칠리아 수녀님에게 4시간이나 뽀샵을 배웠다는데 해도해도 안 되고 또 해봐도 안 되나보다. "아이고, 이제 그만 둬야지." "아냐, 계속해 봐. 될 때까지." 한 시간쯤 지나서 "여보, 됐다!" "그래, 역시 당신은 훌륭해!"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그 나이에 내 사진을 갖고 뽀샵을 하면서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니 말이다. "이담에 크면 당신 더 훌륭해질 거야."

 

DSC09533.jpg 노상덕 "호박고메" 아저씨한테 전화해서 호천이네 집으로 고구마 부쳐달라고 부탁하고, 윤수경씨는 진이네 곶감 값을 물어왔다. 가격이 잘 맞아서 판로가 확보되면 좋을 텐데 수월하지 않을 듯하다.  점심에는 세작차 마시고 남은 차잎을 들기름과 깨소금과 조선간장을 조금씩 넣어 무쳐서 나물로 내놓았다.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좋아 보스코가 맛있게 먹었다.

 

 

 

오후 3시쯤에 마을회관에 내려갔다. 냉동고에 두었던 한과를 꺼내서 녹이고 사과와 배를 한 봉지씩 마련해서 들고 갔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10원짜리 고스톱을 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져간 과일을 깎아드렸다. 여나믄 명이 있었는데 훈수꾼 반, 노름꾼 반이었다. 나머지 네 명은 구들장을 지고 일렬로 누워있다. 저 나이에는 구들장도 아주 무거운 짐이다. 일어나려면 "아이구구구" 비명을 질러야 할 만큼 힘이 드니까 말이다. 건너방에도 남정들이 대여섯 명 있었으므로 과일을 까서  남정들에게도 한 접시 갖다드렸다. 남자들은 한 접시만 주고 여자들은 네 접시를 먹었다. 그러고 나니 참 공평했다는 맘이 든다. 남자들은 담배연기를 배불리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서는 보스코에게도 간식을 차려 주었다. 무엇이든지 잘 먹는 보스코가 좋다. 다만 내가 차려주어야 먹는다는 점이 켕긴다. 들어오면서 보니까 진이 엄마가 아래층 거실에서 혼자 곶감을 만지고 있었으므로 진이 엄마도 불러서 함께 차를 마셨다. 요즘 토마스는 인터넷 곰플레이어로 영화를 보는데 재미를 붙였단다. 취직해서 서울 간 진이는 방을 찾다 친구에게 임시 얹혀살기로 했단다. 이기자네 딸들도 글라라씨가 올라가서 방을 찾았다는 얘기를 어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