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일, 금요일, 맑다가 흐리다가

 

왕산 쪽에서 새 해가 떠오른다. 어제와 다름없는 태양이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의미로 바라다 보인다. 사람이 그어 놓은 어제와 오늘인데 우리는 어제의 문밖에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늘의 문안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들여놓은 셈이다. 아침에 공소예절을 하면서 속으로 뇌어본 기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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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월 1일 해돋이 (소담산방에서 퍼옴)     

 

"올해도 사랑하게 하소서.

올해도 두루두루 살피게 하소서.

보스코의 말대로, 올해도 내 팔이 한 치라도 밖으로 뻗게 하시고 안으로 굽지 말게 하소서.

그래서 올해도 나누면서 기뻐하게 하소서.

모든 일을 두고, 모든 사람에게, 그 모든 시간과 순간에 감사드리게 하소서.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드리게 하소서."

 

이런 날이면 지난 날 잊었던 사람들, 내가 생각만 하다 미처 입밖으로 불러내지 못하고 한 해를 넘기고 만 사람들도 낡은 일기장에서 튀어나오는 작은 요정처럼 사랑의 마술이 불러낸다. 엊저녁부터 오늘 저녁까지 많은 사람들이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왔다.

 

자정에 오빠와 큰올케가 전화를 하더니 아침에는 호연이가 유무상통에서 전화를 해 와서 엄마랑 이모에게 새해 인사를 드렸고 엄마 옆에서 밤을 지낸 호천이 내외에게도 새해를 축원하였다. 두 아들이 찾아 와서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함께 밤을 보냈으니 엄마는 참 흐뭇하셨을 것이다. 우진이도 근무지에서 전화를 해 왔다.

 

친구 혜신이한테서 오랫만에 전화가 왔다. 이혜신 목사는 오라버니 셋이 다 목사일 뿐더러 아버지도 목사님이다. 그니는 목회를 마치고 물러나 연로하신 부모님을 돌봐드리는 삶을 시작한지 두 해다. 아버지 목사님을 모시고 병원에 다니고 뇌졸증이 온 어머니가 어린애처럼 되셔서 귀엽다고 말한다. 그 삶 자체가 의미있고 즐겁단다. 남편목사(오랫동안 병석에 있었다.)를 먼저 보내고 한 때 힘들었던 삶이 두 노인을 돌보면서 기쁨을 얻게 되었다니 우리 여목사님의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훈이 서방님과 동서, 그리고 재작년에 시집가서 아기를 낳아 키우는 심지가 새해인사 전화를 했다. 올해 교장 승진이 있을 것 같단다. 아들 딸 결혼시키고 손자를 보고 교장으로 승진하고... 참 순조로이 축복받은 삶이다.("성염 교수의 살아온 이야기" 의 네번째 꼭지에 이 서방님이 등장한다. 그가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단어를 배운 순간.)

 

이민상 원장도, 한창 재혼의 단꿈에 빠져 있는 이기상 교수도 전화를 했다. 이교수는 2006년에 부인과 사별하고 본인마저 암수술을 한 후에 실의에 빠져 있다가 서울로 학위를 하러온 중국 인텔리여인(조선족)에게서 위안을 얻고 삶의 활기를 되찾으니 곁에서 안타갑게 지켜보던 친구로서는 그만한 다행이 없다.

 

빵고 친구 지하가 전화를 해서 지하엄마랑도 새해 인사를 나누었다. 자기 애정 전부를 쏟던 외아들을 심장마비로 잃고서 10년 넘게 가슴앓이를 해 왔는데 주님이 그 귀여운 딸에 얹어 사위에다 손주까지 안겨주셨다. 지하가 시집가서 아기를 낳고 손주에 대한 AS를  하면서 조금씩 아픔에서 벗어나고 있다. 33년전 우리가 지금 사는 우이동집을 샀을 때 그 집에 세살고 있었으므로 친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참 고맙고도 끈질긴 우정이다.

 

각별히 가깝게 지냈던 슬로베니아 토플락 대사, 슬로바키아 다그마르 여자대사, 대만의 투 대사 부부, 필리핀의 여자대사 베라가 신년인사를 전화로 해 왔다. 베라 대사는 정월에 마닐라에 아시아인 친구 대사들을 초대한다는 전화였는데 때마침 보스코의 평화방송 녹화스케쥴로 어렵게 되었다.

 

이아가다수녀, 최경용신부, 최종수신부, 서정흠수사, 손윤락박사, 박승우씨도 전화선으로 새해문안을 해 왔다. 초등학교 동창 오택렬 교수와도 문안을 나누었고 지리산 주변의 새 벗들 정옥씨, 하과장, 베로니카씨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보스코의 핸드폰에는 권선호신부,살레시오김정수신부, 천안김정수신부, 이무연수녀, 인하아빠, 방석식씨, 이순용씨, 조각가 백용규씨, 이콘화가 최마리아와 이사악부부, 양수길씨, 김정준 피디, 이경씨, 성몽제씨, 송총각의 새해 인사도 찍혀 있었다.  

 

저녁기도를 바친 다음에도 저녁 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보스코가 잠자리에 nani-005.jpg 들기 전에 잠시 텔리비전을 켰는데 때마침 엔니오 모리코네가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에서 신년맞이 "시네마 콘서트"를 열고 있었다. 우리가 적어도 스무번은 찾아간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과 산죠르죠섬과 곤돌라들, 가면과 유리세공보석들을 파는 가계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영상을 하고 화면에 나타나던지!

 

금년에도 내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길은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일일 게다. 다용도실에서 만든 음식을 들고서, 드라이 줄을 목에 걸고서 들어오는 모습이 우스웠던지 보스코가 찰칵!  (손이 둘 밖에 없었고, 드라이는 다용도실의 얼어붙은 세탁기 수도관을 녹이느라 들고 내려갔었다.)

 

모리코네의 영화음악(400편의 영화에 음악을 작곡했단다.)을 좋아하는 보스코는 오랫만에 텔레비전 앞에 주저 앉더니 거의 새벽 2시까지 그의 음악을 감상하였다. 로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그의 경음악을 연주하고 그 합창단이 허밍을 노래해 줄 만큼 국민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는 그의 나이 92세! (2007년에는 생애 처음으로 교향곡을 작곡하여 로마 시청 앞 캄피돌리오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나이에 산마르코 광장을 가득 메운 청중 앞에서 지휘봉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을 지켜 본 다음 "이젠 우리도 늙어가는게 두렵지 않다."는 생각을 안고서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