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2일, 금요일, 눈과 비 그리고 맑고 흐림

 

내 나라 작은 땅덩어리지만 지리산 발치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눈과 비, 흐림과 맑음의 날씨를 다 보면서 달렸다. 그러니 미국이나 러시아 혹은 중극만큼 큰 나라라면 얼마나 다양한 날씨와 기후를 단 하루에 만날 수 있을까!

 

아침 8시에 휴천재를 떠나려니 소나타가 완전히 눈이불을 푸욱 뒤집어 쓰고 자고 있었다. 보스코가 내려가서 유리창 앞의 눈을 치우고 자동차 엔진을 켜 놓아 앞뒤창문의 얼음이 녹아내리게 하였다. 아침에 추워 길이 얼까봐 당산나무 밑에다 차를 가져다 놓았다가 날씨가 좀 풀리는 듯해서 어제밤 늦게 다시 차를 몰고 올라왔다가 하던 참이어서 언덕을 살살 내려왔다. 

 

 엄마 보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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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때 같으면 서울과 충청도에 눈이 하얗게 내려도 이곳 지리산에는 눈이 적었는데 오늘은 육십령터널에 이르기까지는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때로는 함박눈 사이를 달리기도 하고 충청도에서는 햇님 얼굴도 보았다. 호천이는 내가 유무상통의 비탈길을 어떻게 올라가 엄마를 모시고 오나 걱정이 되었는지 30분 간격으로 핸드폰을 때리고 있다. 이 누나가 누군데.... 보스코 말대로는 “인조인간 전순란, 마징가 제트”요 곽선상님 평가로는 “철인 28호”인데....

 

엄마가 계시는 용인 미리내의 실버타운 “유무상통”에 도착하니 산하에 눈이 하얗게 쌓여 진짜로 “실버-타운”이었다. 양로원으로 오르는 비탈길은 제설차와 염화칼슘으로 깨끗이 눈이 치워져 있었다. 눈꽃이 가득 피어서 할머니들도 얼굴이 환하시다.

 

실버타운 "유무상통" 822호실에서 내려다보는  미리내 눈 덮힌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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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신부님은 안나의 집에 가고 안 계시고 원장님이 우리한테 유자차를 대접한 다음에 최근에 조각된 안중근(토마스)의사의 조각상을 보여주었다. 외골수 방신부님은 안중근 의사를 성인으로 시성시킬 참인가 보다. 오른손에 권총을, 왼손에 십자가를 든 성인이라니! 보통 사람들에게는 퍽 낯설 것이다. 지하실에서는 임시로 유무상통 마당에 안치할 석고상에 조각가가 페인트를 손수 칠하고 있었다.

 

유무상통 마당에 임시로 안치될 안중근의사상 (조각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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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층 엄마 방에 올라가니 오래 기다리셨는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뛰어나오셨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 89세의 나이에도 자식을 보면 저리 좋으실까!” 나는 엄마 방에 들어가면 늘 "엄마방 용의검사"부터 한다. 빨래 거리를 찾고, 냉장고를 청소하고 정리하고, 방청소를 하고, 난초든 선인장이든(엄마는 언제나 물에 담가 놓듯이 하시므로) 익사에서 구출하고 (선인장은 물을 싫어한다고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도저히 머리에는 입력이 안 되시나보다)....

 

 

먼 옛날 화전 집에서 엄마는 100여포기가 넘는 선인장을 가꾸고 키우셨는데, 겨울이면 우리집 마루에 모조리 들여놓아서  발 디딜 틈도 없었는데, 그래서 어쩌다 주저앉기라도 할라치면 엉덩이가 고슴도치가 되었는데, 봄부터는 꽃만 보면 얻어다 심어 마당이 꽃으로 가득 찼었는데.... 이제는 그것들에 대한 기억도, 그런 일을 한 일조차도 다 잊어버리신 듯하다. 저 모습은 지금도 서울집과 휴천재 사방에 꽃을 심는 나의 훗날 모습이리라.

 

엄마는 통 말씀이 없으시다. 10여년 전 보스코가 밤에 대학원강의까지 하고 늦게 귀가하던 화요일이면 내가 늘 실버타운에 내려와서 엄마랑 지나다가 보스코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 집에 돌아갔는데 2003년 우리가 로마로 떠나고 나서는 엄마 혼자 외로우셨던지 우울증에 걸리신 적도 있었다. 지금은 괘찮아지셨지만.... 왜 그렇게 말을 않느냐고 물으면 “늙은이가 말 많으면 자식들 이간질시키고 남에게 폐만 된다.”고 대꾸하신다. 좋다 싫다 의사표시도 도무지 없으시다.

 

 

반면에 7층에 계시는 우리 이모는 실버타운의 모든 일에 대해서 의사표시를 하고 다니시는, 그야말로 실버타운의 “반체제인사”이시며, 모든 운동을 다 하러 다니시고, 모든 모임에 참석하신다. 이곳에 오셔서 대대로 믿어오던 불교를 그만두고 천주교에 입교하셨고 그래서 이틀 전 스콜라스티카 성녀 축일에 내가 축하 전화를 드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이곳 삶을 나름대로 “누리고 계시다.” 그러니 실버타운을 운영하는 이들에게 말 없으신 엄마가 더 편한 상대겠지만(“사모님네 어머니는 양반이셔요.”) 또한 즐겁고 활기차게 살아가시는 이모가 그 전문가들의 눈에는 더 안심이 될 지 모른다.

 

 

그래도 내가 빨래감을 챙겨 올케한테 가져간다고 하면 엄마는 “내가 빨 수 있는데 왜 그러니? 네가 며느리면 이렇게 잔뜩 가져가면 좋겠냐?” 하시면서 역정도 낼 줄 아신다. 그 점으로 미루어 아직 노망은 아닌 듯하다. 점심을 먹으면서 보니, 식사 시간에도 얼마 전까지도 반찬을 너무 많이 가져와 남기시더니 지금은 그 부분도 조절하신 듯하다. 늙어서 혼자 남아 외롭다 하지만 한 실버타운에서 함께 사는 엄마와 이모 사이가 그렇게 살뜰한 것 같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늙을수록 혼자 자기 세계에 빠지는 부분이 커가는 것 같다. 그래선지, 운영자들의 말에 의하면, 명절이 되어 자녀들이 모시러 와도 대부분의 노인들이 내심으로는 집에 가길 꺼리신단다. “점심 한 끼 먹고 돌아올 걸 뭣 하러 (차 타고 오고 가는) 그 고생을 하느냐?”는 반응이란다. 그냥 모든 게 귀찮고 그냥 이대로가 편하단다.

 

 "딸년이 오기만 하면 지 에미방 용의검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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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 보스코의 부축을 받으면서 차 있는 곳으로 걸어가시는 엄마의 비칠거리는 걸음이 안쓰럽다. 처녀시절 이화여전 국가대표 농구선수였는데 엄마의 농구공은 지금 어디 갔을까?

 

 

귀성차량은 오늘 벌써 고속도로에 주차장을 이루는데 상경하는 차도는 텅텅 비어서 엄마 말마따나 "신호에 한번도 안 걸리고"(아, 그러고 보니까 고속도로에는 신호등이 없구나!) 씽씽 달려서 호천네 집에 도착하니 오후 3시 반!.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그집 짐을 내리고 다시 집에 오니 다섯 시가 다 되었다. 작은아들 빵고가 짐을 내려주었다. 이번에도 소나타 한 대에서 그 많은 짐이 쏟아져 나왔지만, 빵고에게는 익숙한 터여서 군소리가 없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 마티스에 짐을 잔뜩 싣고서 뒷자리 하나만 남기고 거기에 둘이 앉아서 지리산까지 가게 하던 엄마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