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0일, 수요일, 날씨: 하루종일 봄비가 내리다

 

아침 일찍 제네바에서 빵기가 화상통화로 전화를 해 왔다. 그곳 시간으로는 새벽 2시. 아내와 아들은 곤히 잠든 시간에 이어폰을 꽂고서 통화를 해 온 것이다. 새벽공부를 하다가 엄마가 일어나 있을 시간 같아서 전화를 했단다. 이러저러한 주변 얘기를 하다가 얼마 전 자기 집을 다녀간 두 이종 사촌얘기가 나왔다. 하나는 며칠 묵다가 가면서 "형 잘 지내고 가요."라는 카드를 자기 몰래 책상 위에 남겼고, 학생 신분이면서도 조카(시아)에게 뭐 좀 사주라면서 돈까지 놓고 갔더란다. 집에 돌아가서는 고마웠다는 전화를 물론 해 왔고. 얼마 후 다녀간 다른 애는 같은 또랜데도 돌아가서 전화한 통화 없어 속으로 "애가 뭐 그래?"라고 했다나?

 

내가 "걔는 엄마가 잘못 가르쳐서 그럴 거야."라고 했더니, "그럼 딴 애는 뭐라고 해야 하나요?"라고 반문했다. "걔는 엄마는 못됐지만 아빠가 착하잖아?"라고 대답했다가 나는 문득 “아차, 아들의 논리학 레이더에 딱 걸렸구나!”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뒤에 섰던 남편과 화면상의 빵기가 동시에 껄껄 웃는다. 지난 1월 23일자 일기(“맹장수술은 수술도 아니라는데”)에서 며느리와 딸을 둔 엄마의 편견을 내가 꼬집었는데, 방금 한 내 한 마디로 "여자가 여자에게 모질다."는 여성학의 명제 하나를 나라는 여자가 남편과 아들이라는 두 남자 앞에서 실증한 셈이 되었다. 후자의 경우, 내게 얄미운 여자였더라도 아들을 잘 키운 칭찬을 들었어야 했던 것이다.

 

빵기의 예상된 반박: “엄마, 뭐 논리가 그래?” 내 예정된 시치미: “아무리 생각해도 내 말에 하자가 없어 보이는데?” “엄마, 며칠 전 시아가 배가 아프다고 하기에 사탕 한 알을 줬더니 안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어제 또 배가 아프다면서 사탕을 달라기에 ‘그건 사탕 먹을 배앓이가 아니다.’라고 했더니 지난번과 얘기가 다르다면서 막 따지더라고요. 엄마는 시아보다도 논리에 일관성이 없는 것 같아요.” 내 논리가 세 살짜리 시아보다 낮은 수준이라는 말에 우리 세 사람은 한참을 웃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싯귀가 롱펠로우의 것이던가? 자칫하면 손자가 할머니의 아버지가 될까?

 

보스코와 얘기를 하다가도 논리학을 공부한 철학교수인 그의 레이더망에 내 억지가 자주 걸린다. “당신 말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아.” “아냐, 나는 맞아. 틀렸으면 논리적으로 대 봐!” 그가 조목조목 열거하는 논변을 듣고 나서도 내가 하는 대답은 똑 같다. “그래도 내 말이 맞아!” 보스코는 “아마 그건 여자의 논린가 봐. 비논리의 논리 말이야.” 라면서 한 풀 접어주기는 하지만 영 찝찝하다, 그가 심수봉의 노래(“남자는 다 그래”)를 뒤집어서 “여자는 다 그래!”라고 할까 봐. 누구의 오페라더라? “여자는 다 그래!”(Cosi fan tutte)라는 노래가 이미 작곡되어 전 세계에서 불리게 만든게?

 

오후에는 연술이서방님이 휴천재를 찾아왔다. 김연술씨는 40여 년 전, 내가 영화 “졸업” 비슷하게 결혼을 한 주간 앞두고 집에서 도망쳐 버렸을 적에, 보스코의 주선으로 얼마간 머문 부안 동진의 진구지 마을 사람이다(나는 그 기간을 광야에서와 40일이라 한다). 내가 머문 집은 보스코 친구네 집으로 보스코도 두어 차례 그곳에서 방학을 지냈단다. 그 때 그 집 막내아들 연술이도련님은 군대에서 막 제대하여 소년티를 겨우 벗어난 장난꾸러기 모습이었지만 형들과는 달리 정직하고 진솔한 모습이 보기 좋았던 청년이었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부안어머니”의 초상에서 다시 잠간 그를 보았었다.

 

 40 여년 상거를 두고 만난 연술이서방님 DSC09985.jpg

 

그 어머니는 나를 두어 달 가까이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집안일 밭농사를 열심히 가르치셨다. 그 어머니의 얘기. 1973년 바로 그해 정월, 금산사의 어느 암자에 계시는 스님에게 해마다 온 식구의 신수를 보던 그분은 그해따라 어쩐 일인지 아들 친구 보스코가 생각나서 그의 신수도 봐 달라고 했더란다. 스님의 말씀 “그 총각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구먼.” “아닙니다요, 스님, 그 아이는 올해 천주교 신부될 사람인데요. 장가갈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냥 두고 봐요.” 그랬더니 4월에 나를 데리고 왔다면서 보스코와 내가 천생연분임을 강조하셨다.

 

그 뒤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얼마 전 경기도 가평에서 함안 곶감, 가평 잣, 그리고 가평 쌀을 택배로 그가 보내왔다. 연술이서방님이 우리 생각이 나서 인터넷에서 “성염”을 쳤더니 뭐가 죽 떠오르더란다. 전화하고 선물하고 찾아오기로 약속하고.... 그래서 오늘 함안에서 새만금 가는 길에 우리 집엘 들른 것이다.

 

독일에 가서 6년간 지내면서 조경사 마스터 코스를 밟았고, 귀국하여 건축을 하다가 IMF에 도산하여 빈털터리가 되었고, 신앙의 힘으로 그 시련을 딛고 서서 지금은 하천과 제방에 플매트를 설치하는 기술 공사로 연매출 100억에 이르는 호황을 맞고 있다는 반가운 얘기였다.

 

독일에 가면서 단돈 30만원을 들고 가 석 달 만에 돈 떨어지고, 8개월 만에 언어코스에서 만난 여학생과 사귀다 임신까지 시켜서 공부하랴, 결혼하랴, 아기 낳을 준비하랴, 가족 책임지랴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나갔다. 주말에 유급으로 아르바이트 하고 동네 할머니에게 대쉬하여 그 동네 정원들을 관리해 주면서 식구 먹여 살릴 돈을 벌던 얘기, 아내는 루터란 교회에서 종지기를 하면서 강단소제와 꽃꽂이를 도맡던 얘기, 교회 인사들이 2년간 장학금을 주선해 준 얘기...

 

그 모든 얘기에서 온갖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고 모든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그의 품이 믿음직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부인은 목회자가 되려고 신학교 과정을 밟고 있단다. 60이 다 되어 숙성하게 삶과 인간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청년시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보기 좋았다.

 

그는 휴천재를 떠나면서 뜻밖의 봉투를 내게 내밀면서 설을 쇠라고 하였고, 보스코는 그가 집에서 어느 목사님에게 개인교수를 받고 있다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 “가르멜 산길”과 자기 수상록(“님의 이름을 불러 두고”)을 선물하였다. 나는 은제사진틀을 부인에게 갖다 주어 가족사진을 꼽으라고 하였다. 나를 정말 기쁘게 만든 그의 선물은 언제 어디서나 “열심히 살자!”는 자세로 행복하게 살아온 그의 긍정적 인간상이었다. 내게 온 커다란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