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31일, 일요일, 비뿌리고 흐린 날씨

 

아침부터 빵고가 전화를 해 왔다. 아빠의 영명축일을 축하한다고. 가톨릭교회에서는 세례받고 입교할 적에 자기 신앙생활에 일평생 귀감으로 삼을 성인이나 성녀의 이름을 하나 택하고 그것을 자기 영명(靈名)이라고 한다.(심지어 그런 이름을 본명(本名)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본명이야 자기 부모가 지어준 이름일 텐데.) 그리고 성당에서나 교우들끼리는 그 이름으로 서로 부른다. 특히 시집가자마자 자기 이름을 잃어버리는 한국사회의 여자들에게는 그래도 "데레사씨"니 "막달레나씨" 하는 호칭이 있어서 더 좋다.  또 가톨릭교회에서는 그 성인이 (탄생한 날이 아니고 천국의 탄일을 의미하는) 서거일을 축일로 정한다.

 

오늘은 성요한 보스코의 축일이어서 보스코는 여러군데서 축하전화와 이메일을 받았다. 우리가 이탈리아 토리노에 갔을 적에(1983년과 2004년) 유골에 밀랍을 씌워 생시처럼 만들어놓은 성인의 유해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기도를 올렸다. 보스코의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셨을 적에 세상에 홀로 남은 그 네 형제가 오직 이 성인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살레시오 신부님들에게 거두어져 먹고 자라고 중고등학교 공부를 했던 것이다! 지금은 우리 작은아들 빵고가 살레시안이 되어 제 아버지나 삼촌들의 어렸을 적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창소년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고 있으니 우리는 아무튼 요한보스코 성인과 인연이 깊다.

 

우리가 그래도 행복하다고 보아주는 지인들은 돈보스코 성인을 거론하면, 그 성인의 정신대로 양성을 받아서 온화한 성품을 지닌 내 남편 보스코를 우선 떠올리는 것 같다. 내 인생에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인 내 남편의 축일인만큼 축하할 일이다. 박정일 주교님의 이메일, 김용민 신부님, 김영식 신부님, 김정수 신부님, 김상옥 수녀님, 노유자 수녀님, 김마리아 수녀님, 김용애 수녀님, 최엘리사벳 수녀님, 멀리서는 보스코의 영적 누이 박끼아라 수녀님, 강글라라 수녀님, 국방그라시아 수녀님이 축하를 해오셨다.

 

주일 미사에 갔다가 매달 마지막 주일에 "어르신들"에게 제공되는 점심을 얻어먹을 요량이었는데 주임신부님이 오늘부터는 만 70세 넘은 사람들만 "어르신"으로 대접하겠다고 공지해서 그냥 돌아왔다. 지난 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배추국 점심을 대접받았는데.... 주임신부님의  명분이 멋있게 들렸다. "인생은 칠십부터다!" 그래서 그 나이부터만 어르신으로 대접한다!

 

무제-1.jpg 부지런히 점심을 차렸다. 강낭콩밥에 이상옥씨가 남해에서 가져다 준 우럭으로 지리를 끓이고 신연희 보자관이 사다 준 게장과 본당 수녀님이 가져다 주신 꽃게 삶은 것을 차려내니 밥상이 가득하다. 게장의 뚜껑을 벗겨 그 속에다 밥을 비벼 먹는 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집에 와서 먹길 잘했다.

 

오후에는 마리아 수녀님과 상계동 건영옴니부스(지금은 상영관 이름이 프리머스 시네마로 바뀌었다.)에 가서 요즘 한창 떠들썩한 영화 <아바타>를 보았다. 보스코가 영화감상을 시간낭비로 보기 때문에 옛날부터 영화가 보고 싶으면 나혼자 조용히 이곳에 와서 영화를 보거나 혜화동에 가서 연극을 감상하곤 하였다. 그 대신 잠자리에 누워 내가 종알종알 영화나 연극의 줄거리를 들려주면 그것은 보스코도 흥미있게 귀를 기울인다. 참 별난 남자다. 지금은 나도 지리산자락에서 자연이라는 대스펙타클로 만족하고 있지만....

 

카메론 감독이 터미네이터니 타이타닉 등으로 알려진 스펙터클물 감독이어서 보고 싶었고, 마리아 수녀님이 며칠내로 시골본당으로 이임하실 터여서 이 영화를 보고 가게 하고 싶었다. 3D 화면이 아닌데도 162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퍼온 사진] 영화 "아바타"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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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상과학영화의 줄거리인즉:

  판도라는 지구에서 4.4광년 떨어진 행성으로, 이색적인 자연과 생명력 넘치는 동물들이 가득한 곳이다. 판도라는 자원 고갈로 어려움에 처한 지구상의 인류에게 꼭 필요한 대체자원의 최대 매장지여서 인류는 판도라에 기지를 설치하고, 무분별한 채굴을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행성 판도라와 지구의 피할 수 없는 전쟁 속에서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로 거듭난 지구의 한 남자 '제이크'와 나비(Na'vi)의 '네이티리'가 선택해야 할 단 하나의 운명.

 

33.jpg 판도라는 우림이 대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하늘에는 공중에 뜬 채 끊임없이 이동하는 할렐루야 산이 존재한다. 밤이 되면 판도라의 식물과 동물들에게서 육안으로 구별이 가능한 발광 물질이 뿜어져 나와 눈부신 아름다움을 표출한다.

이 곳에서 살아가는 3미터에 가까운 신장, 긴 꼬리와 푸른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판도라의 토착민인 나비(Na’vi)족은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지닌 우주의 유일한 종족으로, 자신들만의 언어와 문명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행성과 자연, 동족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으며, 인간보다 4배 이상의 운동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영화의 클로징멘트는 "선택받은 몇몇만 그곳에 남고 나머지 인간들은 죽어가는 행성 지구로 돌려보내졌다."로 끝나면서 2탄, 3탄을 예고한다. 

             [퍼온 사진] 영화 "아바타"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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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영화가 끝나고서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한 참이나 객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물결처럼 잔잔하고 부드러운 그곳 생물들의 몸놀림, 천상음악 같은 아름다운 음향, 밤이면 모든 생물체에서 야광이 발산되는 환상적인 세계, 그런 이미지가 오래오래 꿈꾸듯이 나를 사로잡았다.  자연과 동화되어 동식물이 생명과 인식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뉴에이지 사상도 부드럽게녹아 있었다. 또 동구권이 무너진 뒤 단독패권국가가 되어 전세계를 황폐케하는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칼끝도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