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7일 수요일, 종일 흐리고 저녁무렵에 눈이 펄펄 내리다가 비로 바뀜

 

집에 오니까 몸은 좀 불편해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보스코가 옆에 있으니까 기분이 좋다.  내가 없는 동안은 보스코도 잠을 잘 못자고 밤중에 자꾸 깨더라고 호소하는 것을 보면 우리 둘은 천상없이 본드풀로 붙여놓아야지 별 도리가 없는 것 같다.

 

아침에 바오로딸 수녀회 김용애 체칠리아 수녀님이 내가 몸이 아프다고 들었다면서 점심 반찬을 좀 싸다 주겠다는 전화를 해 왔다. 내가 아프다니까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으로 아시나 보다. 보스코는 폐가 된다면서 극구 사양하란다. 하지만 상대방이 기쁜 마음으로 도와 준다는데 사양함도 도리가 아니고 사실 내가 몸을 움직여 점심을 준비하기도 힘들어서 그렇게 하시라고 답변을 드렸다. 보스코 자기가 점심을 차려주거나 죽을 쑤어낼 줄도 모르면서 저렇게 사양하라는 것을 보면 사양지심인지 자존심인지 정말 모르겠다.

 

보스코 칼럼집의 살아온 이야기 (4. "주님께서 너에게 잘 해 주셨으니..." 참조)에 실려 있지만 그가 고등학생 시절에도 고향 당숙네 집에 갔다가 차비 주시는 것을 점잖게 사양하고서는 동전 한 푼 없이 십여리를 걸어가던 얘기가 나온다. 초등학생 아우 찬성이를 데리고 장성에서 광주까지 걸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성모님께 기도를 올리고서는 (기적적으로?) 학교친구를 만나 돈을 꿔서 버스를 타고 왔다는 줄거리다. 성모님 성가시게 하지 말고 당숙모께서 주시는 돈 순순이 받아올 것이지... 방금도 무작정 사양하고나서 뒤에 무슨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닌 그를 보면서 아직도 소싯적 자존심인가 하면서 나 혼자 웃는다. (시동생 성찬성에 관해서는 최근 보스코의 벗 김수복씨가 "지금여기"라는 가톨릭 인터넷  신문에 쓴 글이 있어 아래에 댓글로 퍼 옮겼다.)

 

수녀님은 12시 반에 최경용신부님의 여동생 최엘리사벳수녀님과 함께 오셨는데 두 손에 뭔가 잔뜩 들고 오셨다. 바리바리 들고 오신 반찬합에는 콩나물, 미역줄기볶음, 멸치볶음, 마른새우, 마늘쭁조림, 무우말랭이, 오징어젓, 두부부침, 고추부각, 배추국, 심지어 잡곡밥까지 들어 있었다. 원 세상에! 아예 우리와 밥동무하여 함께 잡수시겠다고 하셨다. 식탁에 차리니 한 상 가득하다. 반찬 하나하나에 부엌수녀님의 정성이며 그것을 열심히 챙기셨을 두 분 수녀님의 사랑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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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칠리아 수녀님은 이탈리아 유학시절에 사귀었고 그렇게나 수줍은 분이 그곳 놀이마당마다 나서서 이탈리아어로 휘가로의 결혼에 나온 곡을 부르면서 춤을 추는 바람에 우리가, 그당시 유행하던 우리나라 대중가요를 따서 "체칠리아, 장장장장"이라고 그분을 불렀다. 70년대와 80년대에 통신성서를 맡고 계실 적에 그 자료를 보스코가 번역해 드리면서 더 가까워졌다. 그러니까 30년이 훨씬 넘는 우정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이탈리아에서 80년대에 함께 지낸 얘기들을 나누었다.

 

80년대 보스코의 유학시절, 우리는 독일 미씨오(MISSIO)라는 곳에서 장학금을 받았지만 우리 부부와 빵기와 빵고  이렇게 네 식구가 살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래서 바오로딸 수녀회(한국 천주교에서는 보통 "책바오로" 수녀님이라고 부른다. 명동의 샤르트르 바오로회 수녀님들을 "쌀바오로" 수녀님이라고 부르듯이.) 관구장 홍아우구스타 수녀님께 부탁해서, 귀국해서 번역을 해드리는 조건으로, 매달 500달러를 받아다 썼다.

 

그래서 매달 25일에 로마 서남쪽에 있는 책바오로 수녀회 총본부로 이 생활비를 받으러 가는데 빵고를 데리고 가면 접수실을 맡고 계신 벨라데타 수녀님(스페인 사람)이 사탕이나 초콜릿을 준비했다가 빵고에게 주곤 하셨다. 그럴 적마다 빵고는 "감사합니다. 헌데 우리 형도 집에 있는데요." 라고 해서 꼭 형 몫을 챙겼다. 2003년에 대사로 가서 그 수녀원을 방문했을 적에도 벨라데타 수녀님은 여전히 접수실을 지키고 계셨다. 유럽에서는 수도원에서도 소임을 한 번 맡으면 종신토록 수행하지 몇 해마다 순환제로 바꾸는 법이 없다. 유럽 고유의 "장인 정신" 때문이고 그래서 누구나 자기 일에 전문가가 된다.

 

그 유학시절, 집세가 싸서 그런대로 빚은 지지 않고 살았지만 애들에게 장난감이나 외식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생일이나 영명축일에 레고(Lego) 작은 것 한 상자씩을 사 주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 조각들은 지금도 서울집 3층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큰 상자 가득하다. 빵고는 전부 형에게 양보하였고 빵기는 자기 아들 시아가 크면 그것을 장난감으로 주겠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고 보관하는 중이다.

 

빵고는 다른 장남감이 별로 없으니까 종이나 상자곽이나 야쿠르트병으로 오리고 붙이고 짜깁고 그리고 하여 장난감을 만들어서 갖고 놀았다. 그곳에서는 유치원에서도 어린이들에게 장난감을 만들어서 갖고 노는 법을 가르쳤다. 그런 놀이 덕분에 빵고는 지금도 살레시오 수도원에서 뭔가 창의적인 장식이나 행사프로그램을 곧잘 만들어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당시 빵기는 길을 가다 식당 진열장에 먹음직스런 요리가 놓여 있으면 군침을 흘리면서 "엄마, 우리도 돈 많이 벌면 꼭 이 집에 와서 저거 먹어봐요, 네?" 라는 말로 기특하게도 엄마의 마음을 서럽게 만들지 않았다. 지난 대사시절 빵기와 함께 그 식당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들어가서 살펴보니 그 전의 주인은 이제 카운터를 보고 있고 주방에는 조카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로마에서는 조그마한 찻집이나 식당 하나도 여러 세대로 이어져 간다. 하루가 다르게 가게 주인과 간판이 바뀌는 서울과는 너무 다르게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 그 집에서 식사까지는 하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고 그냥 나왔다. 훗날 빵기더러 그 식당엘 가자고 하니까 이젠 시효가 지났고 전혀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단다.

 

그 어렵고 가난하던 유학생활 내내 "바오로 가족"(스승예수제자회를 포함해서 남녀 수도회를 통칭하는 말이다.)이 늘 우리 곁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보스코만 아니고 찬성이 서방님도 이 출판사 출판물 번역으로 생업을 삼아왔다(그가 바오로 딸에서만 번역한 책만도 100권이 넘는다).  이래저래 우리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한테서, 오로지 선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너무너무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들임을 새삼 깨닫는다. 두 분 수녀님은 점심 후 설갖이까지 다 하고 접시까지 마른행주로 깨끗이 닦아 주신 다음에 집으로 가셨다. 남겨 두신 반찬은 송총각까지 포함해서 우리 세 식구가 며칠은 먹을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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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보스코가 다시 평화방송 강연 녹화장에 가는 길이어서 송총각이 차를 운전해서 함께 갔다. 그에게도 천주교 수녀원을 방문하고 한신대학교 김항섭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기회여서 기꺼이 갔다. 돌아와서 얘기하는 품이 송총각에게도 강연도 수녀원방문도 퍽 유쾌하고 보람있는 자리였던 것 같았다. 보스코가 오는 차편에 김체칠리아 수녀님이 저녁 반찬을 다시 챙겨 보내셨다. 한 주간은 반찬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