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6일, 수요일, 날씨는 맑은 편

 

입원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이 신비하다. 오랜 병을 앓다가 일어나 처음 올려다보는 하늘처럼 유난히 눈부시다. 오늘은 퇴원하는 날이다. 아침부터 웃옷을 챙겨입고 가방을 쌌다. 같은 날 함께 들어와서 맹장수술을 받은 이정이씨와 전옥년씨가 하는 말. "(우리보다 먼저 퇴원한다고) 재지 말아요. 우리도 내일은 집에 간다구요!"

 

담당의들이 회진을 한다. 각자의 환자들에 대한 의사의 관심과 배려가 환자들에게는 약보다 더 큰 격려가 되는 것 같다. 내 담당의 우고운 선생은 첫날 수술 후에 불쑥 찾아왔다가 사라지고는 복도에서 잠깐 본 게 전부다. 수간호사 김옥련씨와 두상이 서방님이 나를 잘 안다고 하니까 VIP 신드롬을 깨주기 위한 전략인가? 병실의 환우들이 "뭐야, 주치의도 담당의도 언니가 이 병실에 있는 걸 모르나 봐" 하면서 나를 놀린다. "냅 둬. 내가 워낙 건강하니까 들여다보지 않아도 잘 나을 것 같아서일 게야." 라고 대답했다.

 

10시 40분, 보스코가 송총각을 데리고  나를 퇴원시키러 나타났다. 우리 아들들은 다 어디 두고 남의 아들이 효도한다. 이러다 보면 우리 아들도 어디선가 남에게 효도하겠지.... 내 것이라고 웅켜쥐고 있을 필요도 없고 남의 것이라고 낯가릴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인생은 한데 섞여서 굴러가는 이 지구상의 동지들이니까. 송총각이 안 왔더라면 내가 멋지게 차를 몰고 귀가하여 "수술한 사람 어딨어요? 제3탄!"을 할 판인데.... 송총각은 나 없는 사이에 남편의 저녁까지 챙겨주었고 오늘은 나의 귀가를 생각해서 대청소까지 했단다. 하여튼 송총각이 와 주어서 제3탄은 없었다. 고맙다.

 

닷새만에 집에 돌아와 무우국 끓이고 밥을 하고 호박새우젓국을 만들면서 이럴 때는  전옥년씨 남편 같은 남자를 하나 주워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보스코, 그는 총체적인 무능의 상징! 그런데 이럴 경우마다 진이엄마가 나한테 "누구를 탓해요? (남편을 그렇게 길들여 놓고서는)"라는 직격탄을 날리곤 했다. 내탓이요! 반대로 보스코는 다 자기 복일 테고....

 

오후에는 남은 곶감을 부쳐 줘야 해서 살레시오 원석부제의 엄마 안젤라씨에게 여섯 상자, 나정흠 신부의 엄마 루치아씨에게 2상자를 덕성여대 우체국에 가서 착불 택배로 부쳤다, 내가 차를 몰고 가서. 숙연씨가 몇 상자 더 달라고 했는데도 진이네 집에도 곶감이 매진이란다. 반가운 얘기다. 연말에는 진이아빠가 곶감 판로에 대해서 걱정이 태산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해에는 조금만 하겠다고 몇번이나 말했지만 이번 성과로 보아서 금년에는 다섯 동 넘게 할 게다.

 

우체국에 나간 길에 보스코를 바오로딸 수녀원 앞까지 실어다 주고 돌아왔다. 2월에 네 차례에 걸쳐 방영되는 그의 평화방송 강연(영성의 향기)을 이 수녀원에서 강의를 겸해서 녹화하는 자리다. 자기가 두 번 하고, 두 번의 강의는 한신대 김항섭 교수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몸만 성했으면 나도 강의를 듣고 수녀님들과 저녁식사도 함께 할 터인데.... 언제나 풀코스 서비스에만 익숙한 남자라서 마누라가 퇴원해도 죽 한 그릇 끓일 줄 모르는 보스코다. 이제 와서 누굴 탓하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그때마다 가슴을 친다.]  

 

저녁 6시경 오빠가 전화를 했다. 드디어 미선이가 딸을 낳았단다. 애기가 아주 조그만데 손가락 발가락 눈 코 입 귀 없는 게 없다고, 너무너무 신기하다고, 미선이를 닮은 게 너무너무 이쁘다고 말해 왔다. 오빠도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었구나! 지금까지 그 권위의 틀 속에서 얼마나 힘겨웠겠는가! 누가 뭐래도 완전무장 해제하고 주책도 부리면서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줄 손녀딸 하나가 생겼다는 게 오빠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1974년 5월 27일 새벽, 나도 큰아이 빵기를 낳았다. 친정집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당한처지(집에서 장만한 결혼을 한 주간 앞두고 집에서 도망쳐 나갔으니까. 3년 후에야 빵기를 앞세우고 친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여서 전남대 병원에서 강양옥(도미니카)씨의 도움으로 몸을 풀었다. 사흘 후에 퇴원해서는 내 손으로 미역국 끓이고 남편과 시동생들 보살피고 애기를 돌봐야 했다. 아주 힘이 들면 혼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곁에 사랑하는 보스코가 있다는 사살 하나만으로 얼마나 행복했던가! "내가 낳은 당신의 아들이에요." 이 말마디가 그 모든 힘든 시간을 이겨내게 하였다.

 

저녁 10시가 되어 김체칠리아(용애) 수녀님이 전화를 했다. 보스코의 강의가 끝났다고, 처음에는 좀 긴장한 것 같더니 그 다음에는 잘 풀렸다고, 언젠가 이번처럼 파워포인트 없이 맨강의만 들어도 좋겠다고 하였다. 보스코도 돌아와서 파워포인트 때문에 할 얘기를 제대로 못한 것 같다고 자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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