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1일 목요일, 맑음

 

오전에 선내과에 가서 대상포진 치료 주사를 맞았다. 보스코도 함께 간 길에 허벅지에 오래된 피부병을 보이고 처방을 받아왔다. 여기저기 사방데가 가렵고 밤새 피가 나도록 긁적거리는 것을 보면 보스코가 나이 들면서 피부에 지방질이 부족해져서 그런가 보다 했다. 애들도 머리에 헌 데가 생기거나 피부병으로 긁적거리는 모양을 보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있지나 않나 하는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내 동생 호천이도 어렸을 적의 별명이 "땜통"이었다. 유난히 살성이 나빠서 풀에 스치기만 해도 헐고 모기에 물려도 그냥 가라앉는 일이 없어서 종기를 늘 몸에 달고 살았다. 걔가 초등학교 2, 3학년 때였던가? 집에는 아버지가 사냥을 좋아하셔서 사냥개가 두 마리 있었다.  한 놈은 "해피", 한 놈은 "제트"였다. 두 마리가 얼마나 많이 먹고 얼마나 많이 싸는지 똥 치우는 담당이 호천이였는데 걔한테는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둘 중에 제트는 장이 안 좋았는지 늘 설사를 했고 그 똥을 치우지 않았다고 자주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던 호천이가 화가 나서 그 개를 괴롭히던 일도 떠오른다. 결국 그 개는 피부병으로 죽었다.

 

그 무렵 집에서는 닭도 길렀다. 개구리를 잡아다 삶아서 닭 모이에 섞어 주는 일도 호천이 몫이었다. 한 손에는 작대기, 한 손에는 깡통을 들고 개울가를 헤매고 다녔는데 헌데가 생긴 다리며, 풀에만 스쳐도 상처나는 팔뚝을 하고 들을 쏘다니던 걔의 일기장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오늘은 개구릴 잡으러 뚬벙엘 갔다. 물에 빠져서 (하는 수 없이) 헤엄도 쳤다. 붕알이 꽁꽁 얼었다. 끝." 어렸을 적의 사방데 긁힌 손톱자국으로 성한 곳이 없던 호천이의 팔다리가 늙어가는 남편의 여기저기 긁힌 잔등과 오버랩된다.

 

10시 30분에 바오로딸 출판사가 있는 미아리 수녀원엘 갔다. 선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전기가 "세상은 당신이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멋지게 간행되어 있었다. 교황의 수십종 전기 가운데 가장 역사적 서술에 가까워서 선정된 책인데 원래는 빵기가 번역을 맡았다가 자기 공부로 차일피일하자 보스코가 아들 대신에 번역한 책이다. 그의 대사 임기말에 틈틈이 번역한 책이다.

 

보스코의 새 책, 선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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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 온 것은 증정본에 역자의 서명을 해서 70여명에게 부치려는 생각에서였다. 보스코가 서명하면 봉투에 넣고 주소를 써서 택배로 발송해주는 일은 바오로딸 출판사가 맡아서 해 주기로 하였다. 100여권의 책을 쓰고 번역한 보스코이지만 새 책이 나와 증정본에 서명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 항상 흥분하고 흡족한 표정이다. (오늘의 증정으로 출판사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인세를 다 썼다. 그래선지 내 눈치도 상당히 보는 듯하고.) 역자 기증본(보통 10부)을 들고 집에 와서도 들여다보고 또 펴보고 하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책을 쓰거나 옮기거나 발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책이 "귀여운 내 새끼"쯤 되는 것 같다. 곁에서 보는 내 마음도 흐뭇하다.    

 

점심은 수녀님들의 초청으로 수녀원 식당에서 먹었다. 커다란 공동식당에서 120여명 되는 수녀님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지원자, 청원자, 유기서원자, 종신서원자들이 한데 모이니 여러 세대가 함께 먹는 광경이 참 보기 좋았다. 관구장 수녀님, 편집장 마리데레사 수녀님, 우리의 오랜 친구인 표수녀님, 홍수녀님, 김용애수녀님도 우리와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많은 수녀님들이 다가와서 보스코와 나에게 인사를 하였다.  

 

P100121006.jpg   아주아주 옛날부터 이 집에 오면 언제나 내 집처럼 따뜻했다. 바오로 가족은 우리가 로마에 유학하던 시절부터 늘 우리가 한 가족으로 느끼게 우리를 배려해 주었다. 저 젊은 지청원자들, 저렇게 발랄하고 예쁜 아가씨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수행의 길을 택한 것이 참 흐뭇해 보인다. 옷 두어 벌과 세 끼 밥만주면 모든 것을 바쳐 한 가지 사명(이 수녀님들의 경우는 매스컴과 출판을 통한 선교)에 헌신하는 수도생활이야말로 가톨릭교회의 커다란 힘이다. 칼빈이 종교개혁을 했지만 개신교가 생기면서 수도생활을 저버린 것은 안타까운 손실이다(루터교는 서양에서는 수도생활을 고스란히 간직하였다). 한국에서도 간혹 개신교 수도생활이 시도되지만 영 피어나지 못한 채로 고사된다.

 

P100121009.jpg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늘 고맙다. 그들의 삶과 소박하고 오래된 의상(수녀복은 중세 서민 여성들의 복색이 그대로 전수된 것이다.)과 순결한 얼굴과 해맑은 눈동자는 우리에게 이승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저 위에 영원한 것이 있음을 그때그때 일깨워주는 손가락이다. 그들 가까이 그들의 삶의 향내에 묻혀서 살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선물이다. 주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