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4일 목요일, 날씨 흐릿하고 맑음

 

아침 일찍 문자가 왔다. 신현문신부의 글이었다. "이태석신부님이 아침5시 35분 선종하셨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수년간의 대장암과의 괴로운 투쟁을 놓고 이제 주님 안에 안식을 누리겠구나. 나이 50이 미처 안 된 젊은 나이에.... 우리는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병상에서 오래 동안 괴로워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나면 그의 숨이 끊어진 다음에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리는 경우가 있다.

 

20091215170607254.jpg 아침 기도를 그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 바치면서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와의 인연은 1997년 우리가 로마에서 안식년을 보낼 적에 시작되었다. 그 전에는 얼굴만 알고 있었다. 인제의대를 나온 의사였다. 그러다 살레시오수도회 신부가 되었다. 악기 만능으로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다. 못 하는 운동이 없었다. 그 당시 보스코가 만난 로마 살레시안 대학교의 어느 교수, 학점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 교수가 하던 말이 있었다. "교수님, 내가 여태까지 이탈리아 사람이든 외국인이든 내 과목에 만점(summa cum laude)을 줘 본 적이 없었소. 그런데 이번에 만 점을 안 줄 수가 없었소. 그게 당신 나라 사람 이 요한 신부였소." 이처럼 다재다능한 사람이어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 한 병원의 의사로 머물 수가 없었고 그래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수도회를 택했다.

 

그리고 신부가 되자 휑하니 아프리카로 날아갔다. 10년이 넘는 내전으로 고아와 과부들이 무수히 발생한 수단 남부에 선교사로 가서 "한국인 수바이쳐"가 되었다. 너무 헌신적으로 일하다 보니 건강을 상했고 작년에 한국 와서 검사해 보니 대장암이 한참이나 진행되어 있었다. 그 혹독한 투병 중에도 젊은 수사들과 똑같은 규칙생활을 하여 젊은이들에게 깊은 감탄과 모범을 남겼다. 카페를 통해서 그를 사랑하는 펜들이 엄청나게 많고 그를 후원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지난 연말에는 "한미 자랑스러운 의사상"도 받았다. 그렇게 혜성처럼 타오르다 홀연 자취를 감추었다. 나머지는 하느님의 손길에 맡기고, 아프리카의 그 가난하고 힘겨운 청소년들, 그가 툰즈에서 벌이던 선교사업, 그 많은 후원자들과 펜들을(http://cafe.daum.net/WithLeeTaeSuk 참조) 하늘의 섭리에 맡기고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카페의 댓글마따나 "하늘나라에도 일꾼이 필요했나? 이렇게 일찍 차출해 가게?"

 

그의 조문을 위해 일찍 서둘러 11시경 지리산을 떠났다. 배달해야 할 야콘 네 상자, 고구마 네 상자, 팟 여섯 자루, 그리고 진이네 곶감 50박스를 싣고나니 트렁크와 뒷좌석이 가득찼다. 거기다 옷가방과 보스코의 서울 작업 책자들.... 이럴 때마다 보스코의 짜증을 피하려면 그의 눈치를 봐야만 한다. 그가 편히 앉아갈 앞자리는 확보되지만 승용차가 그때마다 짐차가 되는 모양새를 그는 참 못마땅해 한다. 운전은 내가 하는데도 말이다. 다행히 진호가 집에 와 있어 무거운 건 다 실어 주었다. 영이네에 들러 현미30킬로를 더 실었다. 함양 고속도로 입구 주유소에서 고구마 두 상자도 더 실었다.

 

서울 돈보스코 센터에 도착하니 오후 세 시 반. 이태석 신부의 시신은 관구관에 안치되어 있었다. 수녀님들이나 문상온 부인네들의 눈이 모두 벌겋게 부어 있었다. 편안한 얼굴을 한 시신 앞에 기도하고, 연도를 바치고, 상주노릇을 하는 살레시안들을 만나고, 간단히 차를 들고, 막달레나 성님을 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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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보스코를 그곳 상가에 남겨놓고서 호천네로 갔다. 올케는 심장을 앓고 있어서 무거운 것을 못 들기 때문에 짐을 내가 들어서 9층으로 옮겼다. 야콘 세 상자, 고구마 세 상자, 곶감 8상자, 팥 세 자루, 현미찹쌀 30킬로, 칡차, 모과차, 무, 배추, 딸기.  보스코는 이렇게 일하는 내 모습을 볼 적마다 "인조인간 전순란 마징가 제트"라고 놀린다. 동생 호천이는 "대한민국 물류의 3분의 1은 누나가 책임지는 것 같네. 소나타 갖고는 안 되니까 화물차 한 대 사줄 게." 라고 놀리고.... 하느님이 내게 건강과 굵은 팔뚝과 씩씩한 기운을 주셔서 좋다. 그 새에 여기저기 전화해서 진이네 곶감을 50여박스 주문받아 진이엄마에게 넘겨 주었다. 내가 갖고 올라온 박스도 50여개.

 

올케는 사과케익을 구어 주고 보스코의 바지허리를 늘려주었다. 갈수록 그의 배가 나오고 허리가 굵어지는 까닭에  자꾸만 바지를 들고 올케를 찾게된다. 곽선생에게도 전화해서 야콘과 고구마 한 상자씩과 곶감 네 상자를 배달하였다. 이럴 때마다 내가 입술을 깨물면서 절실히 경험하는 바가 있다. "길을 가는 데는 네비를 믿더라도 집을 찾는 데는 네비를 믿지 말라!" 212동을 찾는데 그 깡통이 돈암동  꼭대기를 몇 바퀴나 돌리든지.... 마지막에는 일방통행을 거꾸로 달려서 집을 찾아냈다. 서병무 교수와 곽선생이 택배를 받으러 나왔다. 추운 집에서 대책 없이 떨고 있을지도 모를 보스코 걱정으로 차 한 잔도 못 마시고 집으로 달려왔다. 보스코, 그는 정말 내 운명이다, "징그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