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3일, 수요일, 대체로 맑음

 

아침 일곱 시면 엄마에게 안부전화. 딸의 문안: "엄마, 엊그제 1월이 시작하나 했는데 벌써 중순이네. 여기 사니까 시간이  막 달려가는 것 같애." 엄마의 대답: "나한테는 시간이 날라야 날라." 아하, 그렇다! 자기 나이만큼 시간이 속도를 낸다더니 엄마의 시간은 초음속 마하로 가나보다. 엄마 가슴에 싸한 바람을 남기고서 말이다. 보스코의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칼럼집 → 신앙칼럼 → 이삭줍기 [6])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수명을 지배하는 일은 `모이라이'라고 부르는 세 자매들인데. 언젠가 싫증이 난 모이라이 자매들은 아기 하나가 잉태되자 운명의 실꾸리를 아예 아기에게 맡기면서 마음대로 풀어보라고 하였단다. 아기는 엄마 뱃속이 갑갑하고 사랑스러운 엄마의 얼굴을 보고 싶어 실타래를 부지런히 풀었다. 태어나서는 기저귀가 부끄럽고 젖보다 밥을 먹고 싶어 금방금방 실꾸리를 풀었다. 다음에는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것이 싫고 남들처럼 뛰놀고 싶어 서둘러 풀었다. 그리고는 학교에 빨리 가고 싶어서, 귀찮은 공부를 빨리 마치고 싶어, 아리따운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어, 아내의 뱃속에 있는 사랑스러운 아기가 어서 보고 싶어, 집을 장만하고 싶어, 빨리 승진하고 싶어, 손자를 보고 싶어 급하게 풀다 보니 실 끝이 손에 잡히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 살아가는 날짜로는 다섯 달 하고 열흘 만에 평생의 실꾸리를 다 풀어버렸다는 이야기다.

 

보스코와 나는 그다지 진지한 목적을 세워놓고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다. 큰애 빵기의 말마따나, 보스코는 공부가 좋아서 하다보니 유학을 갔고, 학교에 와서 가르치겠느냐고 물어와서 외국어대학교에 교수로 들어갔고, 서강대가 가톨릭대학교여서 자기 뜻과 더 부합하겠다 싶어서 서강대의 초빙을 받자 그리로 옮겼고(실은 빵기가 예수회 신부가 되고 싶다고 해서이기도 했다), 이탈리아를 아는 가톨릭신자니까 주교황청 한국대사로 가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아서 그곳에 가서 무려 4년 반이나 지내다 왔다. 그리고 지리산집도 비록 돈은 댔지만 진이아빠가 고생고생 터를 닦고 집을 짓고 돌보고 해서 지금까지 편히 살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살다 보니 모든 게 덤으로 얻은 셈이다. 덤으로 사는 만큼 조금이라도 착하게 살아야지 하는 바람을 안고 그냥 물결치는 대로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도.

 

오후 2시에 우리 곶감 비품 두 봉지를 챙겨 들고 화계에 있는 딸기밭을 찾아갔다. 그곳 딸기 비품과 물물교환을 하기 위해서. 딸기밭 안주인과 어제 전화로 약속한 터였다. 가서 보니 "딸기엄마"는 얼마 전에 산청읍에 아동복 가게를 내서 못 나왔고 그니의 시어머니와 잘생긴 그니의 남편이 비닐 하우스에 있었다. 딸기가 첫번 맹추위에 얼어서 이제 겨우 소출을 보기 시작한 참이란다. 진이네도 처음 깎은 곶감은 날씨가 너무 따뜻한 데다 비까지 와 곰팡이가 펴서 한 동(100접) 정도는 정품을 못내게 되어 있다. 이렇게 농사는 하늘이 돕지 않으면 뜻대로 안 되는 것 같다.  그니의 시어머니와 남편이 얼마나 딸기를 많이 담아주는지 물물교환치고 푸짐한 거래였다.

 

화계에서 받아온 딸기가 큰 그릇에 가득...

DSC09616.jpg

 

돌아오는 길에 유림에서 우리 동네 아줌마를 한 사람 보고서 태워주려고 차를 세웠다. 그러자 오는 길에 자기 집이 있다면서 두 사람이 더 탔다. 그 중 한 분은 내가 진주 가는 길에 산청에 있는 무슨 절에 간다면서 두 번이나 내 차를 얻어 탄 분이었다. 시골길이라지만 그렇게 길에서 같은 사람을 만나기가 여간 힘든데 세번째 하이재킹이니 참 인연이 깊다 싶어 유난히 반가웠다. 방가방가 ^.^

 

그분의 집 앞에 내려드렸더니 잠깐 기다리라면서 결명차와 녹두, 팥을 한 봉지씩 들고나와서 나한테 주었고, 오늘 처음 만난 분은 무우 4개를 자루에 담아 주었다. 오늘은 계속해서 물물 교환이다. 그것도 나한테 아주 푸짐하고 아주 이득이 많은 물물교환 말이다. 옛날에 서당 선생님이 월사금으로 계란, 쌀 등을 받던 때가 있었다지만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일이 지리산 이곳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벌어진다. 그냥 가는 자동차 한 번 얻어탔다고 저렇게 후하게들 베풀어 주니 나는 얼마나 공짜 인생을 사는가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문상에 올라가 영이 할머니한테 들러 팥 6되를 샀다. 호천이네와 순행이네가 나한테 주문한 거다. 그러고 나서 마을회관에 들어갔더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두 모여 있어 나를 반겼다. 찰밥에 팥과 밤을 넣어 막 뜸을 들인 참이라면서 나와 보스코 몫을 퍼 주었다. "우리집에는 진이네도 있는데." 내가 염치없이 한 마디 하자 두 사람 몫까지 더 퍼주었다. 위아래층 오늘 저녁밥이 마련된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삶은 공짜 인생임에 틀림없다.

 

저녁기도를 마악 끝냈는데 빵고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태석 신부가 혼수상태로 들어갔단다. "아빠가 내일 올라오셔도 병문안을 못할 테니 그냥 금요일 오시는 게 좋겠다."는 설명이었다. 지난번 서울에 갔던 길에 우리가 병문안을 하러 들르겠다니까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그가 우리를 기다렸는데 추위와 교통체증을 이유로 다음에 보려니 하고 그냥 내려왔었다. 그게 그를 만나 볼 마지막 기회였음을 절감하니 평생을 두고 후회할 일을 하나 더 만든 셈이다. 이승을 떠나는 사람이 우리와 마지막 작별을 하기로 기다리는 자리는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아낀다는 다짐을 할 수 있던 마지막 기회였는데...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만남이 어쩌면 마지막 만남일 수 있는데... 밤 늦게까지 가슴이 저려온다.  이번 주말은 그의 장례식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