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8일 금요일, 맑음

 

새벽에 아랫집 전화벨이 울린다. 끊긴다. 한 참 있다가 다시 울린다. 새벽이라야 아침 7시, 보스코는 벌써 서재에 가서 책상 앞에 앉은 지 한참이다. 아래층 전화가 이층에도 한 대 있고 우리 전화도 한 대 아래층에 있어서 한 쪽이 집을 비울 때는 서로 받아준다. 그런데 새벽에 오는 전화는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산행 하는 날이라면 "지리산 멧돼지들"이 가네 안 가네를 대장에게 묻거나 알려오는 전화겠지만 이렇게 눈 내려 발 묶인 산 속의 새벽 전화는 불안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어제 저녁 기도하러 이층에 올라온 진이엄마의 얘기 대로, 암말기에 있는 큰아버지가 혹시 더 악해되었을까, 재수술받은 조카딸이 더 심해졌을까 추측을 불러 일으킨다. "새벽닭 울적 마다 삶은 노엽고 원통했다."는 어느 시인(이승훈)의 싯귀대로, 새벽이면 온갖 걱정이 되살아나므로 이런 심경이 되나 보다.

 

 그 전화가 염려되어 아침에 물어보니 문정초등학교 있다가 퇴직한 교장님이 꿀 떴느냐고 물어오는 전화였단다. 묻도 또 묻고 한 병 사서 이태를 두고 잡수면서도 왜 꿀이 굳어지느냐고 전화하고 또 전화한단다. 수십년 교단에서 살았던 교장선생님이 자기의 마지막 임지에서 사귄 사람의 안부를 묻는 전화였을 수도 있겠다. 그분에게는 막차에서 내린 마지막 정거장 같은 문정이 아니었을까? "내가 거기서 내린 게 맞나? 거기가 어디였더라?" "문정이에요." "그런데 난 지금 뭘 하고 있지요?" "저하고 전화하고 계시지 않아요?" "아, 그래요? 저 토종꿀 말이오...." 이렇게 모처럼의 전화로 가냘픈 소통의 끈이나마 잇고 싶었을 게다.

 

겨울의 맑은 하늘엔 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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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초였다. 알츠하이머를 앓던 우리 친정아버지.... 보스코는 아버지가 아직 덕양중학교 교장을 하실 적에 로마로 늦깎이 유학을 떠났다. 나는 우이동 집을 세 주고서 빵기, 빵고와 함께 화전에 있는 친정집에서 몇 달을 지내면서 출발을 준비했다.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게 물으셨다. "너 언제 로마 가니?"  "다음 주에요." "그래 언제 돌아오니?" "한 5, 6년 걸린데요."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이 하루에도 내내 되풀이되었다. "너 로마로 떠나는구나. 그리고 5,6년 후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게다. 이젠 더 볼 수 없겠구나. 서운하고도 아쉽다. 하늘나라에서나 만나자꾸나." 사실상 딸과 영이별하는 아버지의 심경이 그 물음과 반복에 배어 있었을 것이다. 유학간 남편 따라갈 생각에만 들떠있던 딸은 아버지의 그 깊은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82년 정월에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로마로 떠나고, 1985년 10월(21일)에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가난한 유학생이 장례식에 올 비용이 없겠다 싶어서 오빠는 장례가 끝나고서야 아버지의 부고를 우리에게 알려왔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과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그 사람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는, 그의 영혼에 맞닿으려는 노력을 여간해서는 소홀히 하고 만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하면서 괴로워하는 일이 얼마나 잦던가! 특히 노인네들이 어눌하고 느린 음성으로, 젊은 사람들을 어려워하는 표정으로 쭈삣거리며 한 마디씩 건네는 말씀에는 이런 메시지들이 담겨 있을 경우가 많다.

 

boco-01.jpg 아침 아홉시, 해가 깊숙히 들어 북쪽 싱크대 앞까지 햇살이 이른다. 보스코가 햇살을 온 몸에 받으면서 창가에 앉아 있다. "아, 군내버스다. 송전으로 들어가지? 아 그리 들어간다!" 창밖을 내다보면서 탄성을 지르는 그의 음성은 "남은 날은 적지만" 삶을 만끽하고 싶은 바램을 담고 있으리라. 집안 가득히 들어온 햇살처럼, 사람들의 영혼 깊숙이에서 우리의 창 두드리는 소리들이 있겠고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귀를 열어두어야겠다.

 

점심을 먹고서 휴천면사무소에 "부끄부끄" 건강체조를 하러 갔다. 체조 후에는 견불에 사는 분이 떡을 가져와서 모두 함께 나누어먹기도 하였다. 간 길에 면사무소에 들렀다. 중년 남자가 앉아 있길래 직원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함양을 수동쪽으로 나오다 휴천쪽으로 꺾으면, 함양 외곽도로에서 유림, 휴천, 마천으로 꺾는 지방도에 도로 표지판이 없으니 면사무소에서 조처하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그건 함양군청 소관이고 유림면에 해당한다는 그의 대답에 내가 다시 채근을 하였다. "그 길은 엄연히 우리 휴천면을 지나서 유림으로 가고 내가 이렇게 찾아와 구두로 민원을 제기하였으니 면에서 조처해아 할 것이 아니냐?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 표지판이 없어 함양읍으로 들어갔다가 되돌아나오는 일이 잦다. 필요하면 서면으로 제출하겠다." 그제서야 그는 알았으니 조처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에게 명함을 남기고 왔는데 저녁에 핸드폰에 문자가 떠서 보니 함양군에 그 사안을 문서로 통보하였다는 내용이 뜨고 부면장으로 이름이 나와 있었다. 나와 얘기하던 사람이 부면장이었나보다.  

 

추위가 창문에 남긴 낙서 (성에)  

DSC09581.jpg    우리가 몇 달을 두고 건강회복을 기도해 온 이태석 신부가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빵고에게서 왔다.  또 클레멘트 신부가 로마에서 보내온 이메일에, 엊그제 한국을 떠나면서 이신부와 찍은 사진이 영이별의 사진으로 실려 있음을 보고서 깊은 슬픔을 느꼈고 그래서 진이네와 함께 염송하는 저녁기도에 그를 위해서 바치는 기도가 더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