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9일 목요일. 맑음


며칠 전부터 서랍마다 뒤지며 돈을 넣어두었던 봉투를 찾았다. '가재잡고 도랑치고' 돈 찾으면서 서랍 구석구석 청소도 하고, 버릴 것은 버리며 정리도 했다. 그런데 도랑을 치웠으면 가재를 잡아야 하는데, 구석구석 뒤져도 돈은 없다.


휴천재 2층집에서 우리가 사는 곳은 윗층이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도 현관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문이 있고 2층 계단 입구문이 따로 있고, 2층 계단을 올라오면 보스코 서재가 있어 그가 하루 거의 15시간 번역일을 하며 경비를 선다(?). 계단 위 복도를 지나 문을 열어야 마룻방이 있고, 또 안방문을 열어야 침실이니 그야말로 문만 해도 다섯을 열어야 들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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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인 소행을 의심하기는 불가능하다. 마당에 차도 늘 문이 열려 있고, 택배 보낼 때도 보낼 물건 위에 만원을 얹어 현관 밖에 놓아두면 택배비를 가져가고 거스름 돈은 그 자리에 돌로 눌러놓고 간다. 택배, 우편물도 마찬가지. 그리고 휴천재에는 울타리도 대문도 없고 모든 문이 다 열려 있다. 도둑이 오면 자물쇠를 부수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함인데 이 동네에 살면서(휴천재를 지은 게 1994년이다) 어느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다.


그러면 범인은 딱 하나, 바로 이 집 주부 전순란이다. 어딘가 엄청 잘 놓아두었을 텐데 잘 놓아둘수록 찾는 일은 더 힘들다. 80년대, 가난한 로마 유학시절. 우리는 바오로딸 수녀님들로부터 매달 생활비 매달 500불을 가불받았다’(귀국하면 번역을 해드리고 갚기로 하고서). 그런데 어느 달 여행을 가면서 수녀님들에게 받은 돈을 보스코 서재 책갈피에 잘(?) 넣어 두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눈물겹게 찾았는지!


간간이 아내의 옷장을 정리해주는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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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6년뒤 귀국하러 이삿짐을 싸며 보스코의 책들을 챙기는데, 책갈피 아닌 책과 책 사이에서 아주 '예에쁜' 봉투 속에 500불이 아주 '야암전히' 숨어 있는 게 아닌가! 6.25 때 헤어진 이산가족 상봉에 맞먹던 그 반가움이란! 귀국 여비도 없어 이탈리아 친구에게 꾸던 형편이었으니, 500불의 행방불명은 미래를 예비한 전순란의 기특한 예금이었다!


오늘 목요일 설장을 보러 읍내에 나갔다. 보스코는 머리를 깎고, 나는 농민으로 내가 농사짓는 경영채 등록을 하고, 시장을 보았다. 모처럼 이발소에 안 가고 보옥당임회장님이 소개하는 미장원에서 머리를 깎았는데, 얼마나 소개를 잘해 주었던지, 내가 장 보는 한 시간 반 동안을 깎고 또 깎으면서 '작품'을 만들더란다한여름이었으면 좋았을 정도로 짧게 머리를 깎았다. 보는 내가 더 추워서 '모자 꼭 쓰세요'라고 했다. '왜 좀 길게 해 달라고 하지?' 하니까 예술가가 너무 열심히 작품에 몰두해서 말을 걸 수가 없더라나. '머리는 곧 자랄 테니까' 나더러 걱정 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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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랜만에 방곡에 사는 이교수댁에 들러 차를 대접 받고그 집 아랫집 사는 동생네 부부도 올라와 요즘 윤가가 저지르는 속 터지는 세상 이야기를 나누었다집안에서 사고 치면 대충 눈치껏 뒷수습을 하지만집밖에도 나가기만 하면 사고를 치니(외교참사국민은 속수무책이요, 보수 언론은 덮어주기 바쁘고안기부와 검찰이 공안사건이나 만들어 국민의 눈과 귀를 돌리는 형국 같아서 어느 정치인이 "전두환의 잔인함과 이명박의 사악함박근혜의 무능함을 모두 갖춘 정부"라고 한 비판이 고개를 끄덕이게 하니 몇 달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나 가슴을 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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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집에는 고양이 아파트가 있다.  예술가가 헌옷으로 만든 고양이들의 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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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떠돌이 개가 두 마리 있다. 소위 '유기견'으로 신고되어 면에서 몇 번이나 잡으러 왔지만 잘들 피해 안 잡히고 산다. 그리고 화산댁네 집에는 아주 못생긴 삽살이 두 마리가 있는데 견성도 얼굴 만큼이나 못됐다. 우리가 지나다니면 자주보는데도 얼마나 사납게 짖어대는지, 여간해서 지기 싫어하는 나도 이를 드러내고 개의 언어로 으르렁거리며 "너 맘에 안들어"라고 한다.


그 떠돌이 개중 흰 개 암컷의 배가 늘어져 있더니 검은굴댁 뒤안에서 며칠 전 새끼를 낳았단다. 돌아가신 검은굴댁 양반이 해다 놓은 나무 더미 밑에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는데 두 마리는 이번 강추위에 얼어 죽고 어미 품에 안겨진 세 마리만 살아남아 꼬물거리는데 그 어미가 어디서 밥을 얻어먹나 드물댁이 지켜 보았단다. 그런데 화산댁 그 악다구리 삽살이가 새끼 낳은 떠돌이가 오니 제 밥그릇을 내주고는 뒤로 물러서더란다! 


밤이면 두 마리 떠돌이들이 우리집 휴천재 부엌밖을 서성거리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나도 오늘 저녁엔 먹다 남은 고기와 밥을 비벼 뒤꼍에 내놓았다뼈만 앙상한 채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는 그 암캐가 같은 동지로 느껴지니 감정의 흐름은 물길 같아 거스를 수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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