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3년 1월 5일 목요일. 흐림
오늘 바티칸에서는 베네딕토 16세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우리가 대사로 2004년에 참석했던 요한 바오로 2세의 성대한 장례식이 기억난다. 무려 4반 세기 교황직에 있었고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를 방문한 분(한국도 두 번 방문했다)이어서 국가수반들이 거의 다 참석했으니까. 이번 장례미사는 바티칸 역사상 현교황이 전임교황의 장례식을 주관하는 첫번 사례일 게다. 그래도 로마에는 "교황이 죽어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속담이 있다. 이탈리아 중부가 천 년 넘게 '교황국'이던 시대의 잔재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안치, 오늘 있었던 베네딕토 16세 장례
전세계 13억 가톨릭신자들을 지도하던 교황의 소박한 삼나무관이 생각난다. 우리 딸 순둥이가 우리 서울집과 휴천재를 둘러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고 걱정한다. 3층 다락까지 두 집에 널려 있는 옷가지며 이불채며 살림들, 특히 보스코 서재의 책들이며, 특히 지난 50년 동안 찍어온 사진 앨범들은 어찌 처리될 것인지 염려되나 보다.
가키아 미우가 쓴 『시어머니의 유품정리』을 보면, 그래도 부모에 대한 작은 애정이나마 있는 아들이라면 소중한 몇 가지라도 자기 집에 남겨두려 할지 몰라도 시어미가 쓰던 물건이나 입던 옷이나 들던 핸드백을 (혹시 패물이라면 몰라도) 반길 며느리는 하나도 없을 게다. 큰아들은 이역만리에 있고 작은아들은 아예 출가한 몸이어서 우린 특히 그렇다.
얼마 전 내 친구 시엄니가 요양원에 가시며 당신 집에 두고 간 커다란 새 TV를 두고 남편이 "여보, 이건 내가 최근에 사드렸고 우리 것보다 크고 좋으니 가져갑시다." 했다가 자기한테 혼쭐났다는 얘기도 들은 터. "행여 엄니 꺼 뭐라도 우리 집에 들일 생각이면 각오해!"라는 불호령을 내렸다나?
함양 일대에서는 이웃 남원군 아영 골짜기에서 나오는 과일이 제일 맛있다. 당도나 식감이 뛰어나다, 포도, 딸기, 늦가을 사과까지. 나도 일부러 그곳까지 사러 간다. 떡은 몰라도 과일은 '보기 좋은 게 먹기도 좋다'는 말이 내게는 안 통한다. 나는 커다랗고 때깔 좋은 사과보다 새가 쪼아서 터진 열과를 즐겨 산다. 짐승이 사람보다 맛을 더 잘 안다.
과일 파는 아저씨에게 "얘는 왜 이렇게 못생겼어요?"라고 물을라치면 '굽은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는 옛 속담을 내세운다. "어메 아베가 같은 한 집 애들 중에도 어떤 놈은 잘생기고 잘나가지만 지지리 못난 애도 있지 않소? 나 같은 못난이 아니면 부모 곁에 남아 과일농사 지으며 살겠소?" "... ..."
어제는 다시물 내리려고 이번에 선물받은 큰멸치를 한 상자 까고 있으려니 드물댁이 올라왔다. '오가며 그집 앞을 지나노라면' 가사처럼 이 칼바람 속에서도 일부러 휴천재 옆을 지나다 식당채 불이 켜져 있으면 들어오곤 한다. 서너 시간을 함께 멸치를 깠다. 시집 와서부터 이 동네에서 살아온 얘기, 요즘 있었던 주변 얘기를 도란도란 꺼내 과거와 현재의 시공을 넘나들며 재미있게 풀어낸다.
둘째 딸이 초딩 3학년, 셋째가 2학년이었단다. “핵교서 운동회 하는디 부채를 사오라캤서. 돈이 한 푼도 엄섰서. 핵교앞 병곡댁한테 갔제. 외상으로 주면 갚을 꺼마고. 근데 절대 안 줘. 야들은 학교 앞서 통곡을 하고... 지나가던 핵교 선상님이 그걸 보고 부채 두 개를 사줘 운동회에 갔고마.” 마천에서 유림까지 유일한 구멍가게였고 같은 집안인데도 외상을 안 주었던가 보다.
"한번은 중핵교 다니는 아들 월사금을 시동생한테 꿔서 놔 두었고만. 근데 보니 누가 훔쳐가써. 아들은 울고 난리가 아니었제." "그래, 어떡했어요?" "아야, 아야, 울지마라. 우리보다 몬한 사람이니께 가져갔을 끼다. 오죽 답답하면 우리 같은 사람 껄 가져갔겠나? 암말도 마라." "그러고?" "시동생한테 또 꿨제!"
논이고 밭이고 땅 뙈기 한 뼘도 없으면 동네 허드렛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도 삼녀일남 자식들이 제대로 커서 대처 나가 살고 있는 게 아줌마의 제일 큰 보람이다. 이 동네에서 30년 넘게 살다 가신 헤드빅 수녀님에게 자식들 학교 보내는데 신세 안 진 사람이 거의 없는 동네지만, 내 귀로 듣기로는, 그 은덕에 고마움을 간간이 입밖에 내는 여자는 드물댁뿐이었다.
동네에 그미에겐 유일한 친구가 있다. '자기보다 못한(못난?)' 사람이 동네에 하나 있다는 자부심이 있고, 그 여자에게 유일하게 벗이 되어주는 드물댁. 그 아줌마가 갑자기 남편을 사별하자 몇 달이나 '잠동무'가 되어주기도 했다. 동네여자들 구박을 견디다 못한 그 여자가 유난히 자기를 괴롭히는 아짐을 지목하며 "쩌여자 죽어뿌리고 안보였으면 조캈써." 하더라나? "맘이야 가탰지만, 난 암 소리도 안 했써. 그러면 쓰간디, 아무리 몬댓써도."
시계를 읽을 줄 모르는 터라서, 큰딸이 사준 핸폰이 시간을 일러준다. 그집 세 딸은 하루 한번씩은 안부 전화를 해 엄마를 살피는 효녀들이다. 얼마 전까지 핸폰이 여자애 목소리로 "여섯 씨~~"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어느 새 "여섯시 입니다”라는 상냥한 처녀 목소리로 바뀌었다. "엉? 소리가 바뀌었네요." 했더니 "가도 그새 안 컸겄소?"라는 익살스런 답변. 세 시간 가까이 아줌마는 많이 웃고 웃기다 섯달 보름이 가까운 고샅길을 따라 달보다 훤한 얼굴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