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9일 목요일. 맑음


올해도 다 가고 사흘 남았다. 내 손가락 수술로, 보스코의 폐암수술로 스산했고 사람들 걱정도 끼치고. 팔순을 넘긴 보스코는 심장 스턴트와 폐수술, 칠순 중반에 다가가는 나는 눈과 손과 무릎으로 고생하면서 우리가 살아온 세월에 이 남루한 거처가 어지간히 퇴락해감을 절감한다.


지리산에 지는 해(조하성봉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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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날씨가 바람 한 점 없이 포근했다. 바람이 차다고 지리산에 내려온지 열흘이 넘었는데 한번도 걷기를 하지 않았더니 내 다리에 힘이 없다. 내가 걷자는 말을 안 하니 보스코 역시 집안에서 책상에 앉았다, 소파에 누웠다, 운동이라고는 숨쉬기가 전부


숨쉬기 운동마저 코로 쉬는 게 아니고 그는 주로 입으로 쉬기에, 김원장님은 그의 입에 테이프를 붙여주라고 했다. 코 기능은 냄새를 맡고 숨을 들이마시는 거라고 그렇게 일러주어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을 벌려 숨을 쉬니 보스코는 코와 입이 호흡기에 직결된 사람이어서 연구 사례가 될 것 같다.


잉구에게 장갑 한 컬래 전해줄 겸, 점심을 먹자마자 윗동네로 해서 마을 한 바퀴를 돌기로 했다. 잉구네는 곶감을 만지느라 집안 전체가 곶감 천지였다. 우리 동네는 이만 때쯤엔 집집마다 처마 끝에 얼다 녹다 빨갛게 붉어진 반건시가 매달려 있어 지나가다 심심하면 하나씩 따먹고 다닌다. 잉구엄니가 비닐봉지에 곶감을 담아 주시며 산봇길에 먹으라고 들려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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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 언덕 위로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배롱나무(목백일홍)가 조막손으로 손질되어 있다. 금년봄 내가 손가락 수술을 해서 보스코더러 배롱나무 손질을 부탁했더니 휴천재의 백일홍은 참 엉성했다. 내가 실물을 보여주며 ‘배롱나무 손질은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현장학습을 시켰다.


로사리오를 하며 내려와 한길에 도착하니 도로공사를 하고 있다. 동네 할머니들 전동차도 다니게 한길 양편에 인도를 확장하는 공사다. 도로인 국유지에 컨테이너 등을 놓았던 외지인들의 살림살이가 한쪽으로 스산하게 쌓여 있다. 인부들이 강바람에 덜덜 떨며 일하는 모습엔 행정당국의 속셈을 모르겠다. 연말에라도 개시되어야 그 해로 편성된 예산을 쓸 수 있다는 보스코의 설명인데, 도시에서도 따뜻한 날 다 지나고 연말이 되면 보도블럭 교체등 온갖 도로공사로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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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씨 좋은 드물댁이 요 며칠 심통이 났었다. 그미 말에 의하면, 동네 오던 도우미 아줌마의 부탁으로 화산댁, 종술이각시, 어람댁 집을 찾아가 짐도 거들고 화목 보일러에 나무도 넣어주었는데 셋이 다 코로나에 걸리자 드물댁이 퍼뜨렸다고 소문이 났단다본인은 아무 기미가 없고, 얼마 전 내가 읍에 데리고 나가 검사까지 받게 했는데 말이다. 


마을회관에 있는데, 이장의 불호령이 떨어지더란다. "당장 집으로 가서 나오라고 할 때까지 꼼짝 마!" 선심 쓰고 격리 당하니 너무 억울하다며 문밖에도 안 나가고 화를 가라앉히고 있던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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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교 다리께 공중화장실 옆에 한 필지 땅이 있다. 이웃동네 젊은이가 도지를 내고 농사를 짓는단다. 지난여름엔 참깨를 심었는데 '밤에는 참깨도 자야 한다'면서 동네 가로등을 꺼버렸는데 교통사고 위험이 제일 큰 삼거리(몇 해 전 내 눈으로 사고를 목격했다)여서 동네사람들과 많이도 싸웠다


그런데 올가을엔 양파를 심더니 동네 상수도로 물을 주었다. 그렇쟎아도 물이 부족한 동네 사람들은 속을 끓이면서도 하도 거친 사람이라 말리지 못하고 있었단다. 그때 동네 구원투수 이장이 나섰다. 그 밭으로 가던 호스를 빼버리고 수돗물을 잠갔다. 그 사람 입에서 듣도 보도 못하던 온갖 욕이 쏟아져 나왔는데 우리 이장은 얼굴을 눈으로 한번 쓰악 긁고서 "어이, 젊은이. 욕하기로 하면 나도 빠지지 않어. 입이 더러워지니까 안 하는 겨. 이건 동네 상수도지 농사용수가 아녀. 상수도로 모잘러. 필요하면 농사용수 끌어다 써." 동네 아짐들 쌈 날까 아슬아슬하던 가슴이 활짝 펴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욕은 욕으로 갚는 게 아닌가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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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목요일 오후. 가리점 쪽으로 산보를 갔다. 앞산의 북쪽 비탈이어서 내린 눈이 거의 안 녹았다. 눈길 위에 뿌려진 모래 위로 조심스레 걷는데 산불지킴이가 내려온다. "이쪽 운서는 음진디 세동 쪽은 눈이 다 녹았으니께 그쪽으로 가셔유." 라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눈이 오면 산불지킴이들은 사실상 휴무여서 우리 노인들 넘어질까 지켜주는 특근으로 바꿨나 보다.


우리 동네에서 '손잡고' 눈길을 걸을 노 부부가 세 쌍도 안 된다. 우선 "안방 아랫목에 누웠으나 앞산 양지에 누웠으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듣던 영감들이 앞산으로 옮겨가서 뗏장이불을 덮고 누워버렸고, 아직도 남녀가 내외해서 '아휴, 남사스럽게 팔장을 끼고 다니긴.' 이라고들 흉 본다. 속으로야 '누군 좋겠다. 화장 곱게 하고 예쁘게 차려 입고 옆에 신랑 끼고 살랑살랑 산보나 다니고.'라는 부러움도 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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