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2일 목요일. 눈눈눈
어제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금년 들어 휴천재 마당에 처음으로 눈이 쌓여 보스코의 그 ‘하트병’이 도져 마당에 하트를 그리고서 어떤 여자 이름을 새겨 넣었다. 오늘은 새벽부터 펑펑 내리는 눈이 앞산이 안 보이게 쏟아져 하트도 이름도 눈으로 지워졌다.
작년 묵은쌀이 한 말은 넘는데, 햅쌀이 나오니까 묵은쌀은 먹기 싫다. 가래떡을 뽑아다 구워도 먹고 긴긴 겨울 떡국이나 떡볶이도 해먹기로 하고 쌀을 물에 씻어 담갔다. 어제 아침 내린 눈이 발목까지 쌓여 우선 집앞을 쓸고 차를 살살 달래며 마을 언덕길을 내려갔다. 우리 대모님 ‘처방’대로 몇 방울 성수(성수병에서 얼어 있었다!)를 찍어 내 이마에도 바르고 자동차에도 발라 주며 성모님과 내 수호천사와 내 수호성인 과 영험하실 만한 분들 전부에게 무사귀환을 빌면서...아무튼 떡방앗간까지 체인 안 감고 눈길을 다녀왔다.
오늘은 동지. 어제 걸러 놓은 팥에 찹쌀과 새알을 넣고 동지죽을 끓여 진이네 한 대접 보내고 보스코랑 백김치에 맛나게 먹었다. 저녁을 먹으며 “여보, 늘 축제를 축제로 챙겨줘 고마워!” 오늘도 남편에게 이 인사를 받는 재미에 전순란은 허리 휘는 줄을 모른다. 축일과 명절을 챙기는 일은 보스코의 몸에 밴 습관이어서 나도 덩달아 50년간 명절을 차려왔다.
축일이면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음식을 나누고 정을 나눠야 삶이 풍성해지지 않던가? 서양의 성탄절은 우리 추석처럼 타향에 나가 사는 모든 자녀가 부모님 슬하로 한데 모인다. 오늘 오후 이탈리아 친구들 몇몇과 전화로 성탄절 인사를 나누었다. 요 몇 해에 과부 된 친구가 여럿이다. 장혜숙 화백(아르만도), 발레리아(코라도), 이레네(마리오), 안나(델피노), 마리아 피아(돈쟌카를로 누이), 마리아 그라지아(미켈레), 프란체스카(쥴리아노)... 이 성탄에는 자녀, 손주들과 행복한 시간을 갖겠지만 등 시린 세월을 어찌들 보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카르멜라의 세 손주. 80년대 빵기 빵고와 함께 자란 막시와 시모네의 얼굴 그대로다
나이 들어 외출과 만남이 줄 듯 우리가 명절에 차리는 밥상에도 손님들이 뜸해지면 그만큼 삶이 허전해지지 않던가? 우리 인생의 모든 만남이 그만큼 고마웠지 않던가? Gracias a la vida! 라는 노래처럼, 삶 자체가 고마워 오늘도 오후내내 성탄과자 ‘칸툭치니’를 구웠다.
큼직한 반절지에 50여명 수녀님들이 함께 성탄을 축하해주고 보스코의 수술과 건강회복을 빌어준 성탄카드가 고마워 ‘사랑하는 성바오로딸 수도회 수녀님들께’ 다음과 같은 성탄절 인사를 써 보냈다.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과 친교를 맺으며 살아와서 행복했지만 바오로딸('책바오로') 수녀님들과 가장 끈끈한 섭리로 맺어진 우리의 50년이었다.
정기검진차 서울을 다녀오니 지리산 집에서 수녀님들의 커다란 성탄선물 상자가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판부 수녀님들의 푸짐하고 영성 깊은 책들과 선물들과 구운 과자, 특히 두루말이 상자 속에 담긴 수녀님들의 축하와 기도라니! 저희 평생 가까운 분들에게서 받아온 그 많은 축하 가운데 이만큼 큰 카드와 기도 선물은 처음이었습니다!
바오로 가족이 저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커다란 종이에 수녀님네 공동체들 회원들께서 골고루 친필로 축원해주시고 보스코의 건강 위해 기도해주신 정성에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수녀님들의 이런 기도를 힘입어 보스코는 수녀님들의 출판사도직에 번역자로 참여하는 영광을 입었고, 수녀님네 성탄절 부활절 자정미사마다 장궤틀 밑에서 잠들던 빵고는 수녀님들의 소명을 나눠받아 살레시오 사제가 되었고, 빵기는 ‘굿네이버스’ 일꾼으로 전 세계에서 재난당한 이들에게 수녀님들의 미소를 전달하러 돌아다닙니다. ‘성바오로딸들’의 치맛바람이 이렇게 널리 미칩니다.
보스코의 사회생활(광주가톨릭대, 로마 교황립살레시안대, 서강대, 주교황청대사관) 역시 어머니이신 교회의 치마폭을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특전도 분명히 성바오로딸들의 치맛바람 덕택이었습니다.
보스코의 수술결과는 참으로 결과가 좋아 집도의로부터 “천수를 누릴 것입니다!”라는 확약을 받았는데 한편으로는 수녀님들의 애정 어린 기도에 그를 떠맡기는 주문으로도 들렸습니다.
관구장 수녀님을 비롯하여, 일일이 기도와 축원을 빌어주신 수녀님들과 공동체 원장님들, 추억이 생생한 역대 관구장수녀님들과 평의원수녀님들, 특히 출판편집담당 수녀님들, 옛날 활판인쇄 시절에 보스코의 악필 원고를 읽으며 문선하던 고생, 억지글을 윤문하는 수고를 치르신 수녀님들께 새해 2023년 인사를 올립니다.
휴천재 바깥에는 여전히 눈은 쌓이고 지리산과 온 세상이 두툼한 눈이불 덮고 잠들 듯이 늙은 두 남녀의 다정도 그만큼 두툼하게 덮히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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