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2년 12월 18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아침. 아직도 눈 내린 길은 꽁꽁 얼어 있다. 겨우 걷는 다리가 행여 다시 상할까 대문 밖 출입에 신경이 쓰인다. 크리스마스니까 뭔가 준비하고 나눠야 축일인데, 전날 맞은 예방주사로 온몸이 나른하다.
조광호 신부님의 '동감도 채플'
로마에서 친구들과 함께한 성탄은 빠네또네(Panetone), 커다란 초콜릿, 흰엿으로 만들어진 또로네(Torrone)의 계절이었다. 해마다 코스트코에서 '빠네또네'를 구입하여 친지들과 나누던 관례가 금년에는 보스코의 폐수술로 경황이 없어 그냥 넘어갔다. 그래도 이 계절엔 덩달아 단 게 땡겨 호천이에게 전화를 했다.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그릇을 꺼내고 화려하게 껍질을 장식한 초콜릿을 가득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친구들을 불러 함께 나누고 싶어’ 코스트코에 같이 가 달라고 부탁했다.
이탈리아에서 13년을 보내며 성탄과 연말을 지내면 다디단 초콜릿과 사탕, 기름진 음식으로 몸무게가 4~5킬로 붓는 건 금방이었다. 절제가 불가능한 이탈리아 친구들은 허리띠를 풀어놓고 마음 편히 먹어 대며 ‘에이, 사순절에 빼면 되지.’ 라고들 한다. 하지만 사순절이 시작되기 직전에 ‘카니발(carne–vale: ‘고기여 안녕!’)이라는 또 다른 복병이 숨어있다. 그러니 처녀 때 그 날씬하고 꽃 같은 아가씨를 보고 결혼했던 그곳 남자들은 설흔을 넘기는 아내의 푸짐한 몸매에 ‘속았다!’고들 탄식하곤 한다. 남자들도 술통에 대머리로 늙어들 가지만 나이들수록 듬직해지는 신사들도 참 많다.
호천이가 아침 일찍 올케를 병원에 데려가서 혈액검사를 받게 하고, 아침을 챙겨 먹인 다음, '먹구대학 풍덩과'(수영장)에 보낸 참이라 호천이만 집에 혼자 있단다. 모레내에 가서 걔 차로 코스트코에 함께 들러 초콜릿과 과자를 원 없이 샀다. 동생은 ‘자기가 아직 현역’이라며 점심을 사주겠다더니 늦은 점심으로 과메기를 먹여 줬다. 자기는 저녁에도 연말모임이 있다며 매형 갖다 드리라며 과메기는 챙겨 준다. 주변의 누구든지 살피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걔의 삶 자체가 축복이다.
보스코는 금요일 점심에 모처럼 강남에서 열리는 살레시오 동창 모임(‘사이회’)에 나가겠다 더니 찬 공기가 폐에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다시 책상을 지키는 중이었다. 사실 나도 그날 선배 언니들과 인사동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가 미끄러운 길이 겁난다며 언니들 편에서 취소한 터였다. 나이 들어 낙상하면 대부분 고관절이 부러지고, 수술 후에 오래 누워 있다 폐렴으로 돌아 세상을 떠나는 분을 많이 보아왔다. ‘100세 시대’를 맞아 자기 자신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나보다.
토요일엔 세 딸과 성탄 및 송년모임을 가졌다. 내 대모 김상옥 수녀님, 그리고 한 목사(세 딸은 ‘이모님’이라 부른다)도 우리 집으로서 모였다. 보스코는 너무 좋아 딸 하나하나를 뜨겁게 안아준다. 딸들이 나더러 "절대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엄포를 하더니 큰딸은 너무 예뻐 먹기가 겁나는 반찬 초밥을, 꼬맹이는 역사 있는 만두전골을 마련해왔다. 나는 식탁을 차리고 묵은 김치, 새 김치, 석박지만 내놓았다. 설거지도 못하게 말리고 겨우 숨쉬기만 허락하는 바람에 나로서는 편하디 편한 명절을 맞았다.
각자 정성스레 장만해온 풍성한 선물들을 나누었다. 딸들과 만나면 서로 살피고, 어려운 이야기도 나누며 격려하고, 재미있는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다들 바쁜 생활에 시간을 쪼개서 만났기에 3시에는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올 때는 대모님과 순둥이를 이엘리가 모셔왔는데 돌아갈 때는 내가 강화도 조광호 신부님을 찾아뵈러 가는 길이어서 둘을 부천까지 모셔갔다.
계산동에서 강화도 길은 별로 막히지 않아 5시 반에 도착했다. 조광호 신부님이 만드신 ‘동검도 채플’은 예술가의 안목으로 마련하셨기에 옆으로는 수십만평의 바다를 끼고(그날은 썰물 때여서 눈으로 하얀 설원을 이루고 있었다) 기도실 창으로는 마니산이 정면으로 바라다 뵈는 기막힌 명소였다. 그분의 꿈과 노년의 넉넉함이 사제로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려는 너그러움으로 구현되어 있었다(우리에게는 그분의 작품이 ‘예수 성면’, ‘아브라함의 이사악 제사’, ‘베들레헴과 골고타’ 세 점이나 있다).
오랜 친구가 찾아와 잠깐 보고 가는 게 아쉬워 신부님은 우리더러 손님방에서 자고 가라 하시는데 다음에 다시 와서 긴 얘기를 나누면서 그 채플의 새벽과 낮 그리고 그 늪지로 지는 저녁노을 전부를 감상하기로 약속하고 밤운전을 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보스코의 주일복음 단상: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200
오늘 일요일은 대림 제4주일. 네번째 하얀 초에 빛을 밝히니 구세주가 곧 오시겠다. 보라색 첫 초에 불을 켠 게 엊그제였는데 그새 시간이 이렇게 갔다. 인생도 그만큼 잠시다. 그간 우이성당 주일학교 미사였던 9시 미사가 교중미사로 바뀌었다.
어제 읽은 마태오 복음,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예수님 족보는 고개를 갸웃뚱하게 만든다.
점심에 두상이 서방님과 동서가 왔다. 올 일년은 두상이 서방님 덕분에 보스코가 폐암의 마수를 피했고 4년 전에는 심장 스턴트 시술로 심장마비를 면했으니 서방님은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사이사이에도 병원에서 서방님이 수술한 환자 관리에 관한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 의사, 더구나 흉부외과 의사라는 직업이 절대 쉬운 직업은 아니다. 빵기가 어렸을 적부터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일찍 그 꿈을 접은 일은 본인과 가족을 위해서는 어쩌면 고마운 일이겠다.
동네 ‘서울연합봄의원’ 내 담당 의사가 내 무릎 MRㅣ를 보고는 무릎에 통증이 없다는 게 이상하다고 혈액검사를 해보자 했었는데 어제 그 결과가 문자로 왔다. '염증도 없고 류마치스 증상 소견도 없다!' 내 몸이 '70년 묵은 낡은 집'이지만 비바람은 피할 수 있으니 우선은 맘 놓고 살자고 맘먹으니 왠지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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