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3일 화요일, 올 겨울 첫 눈
일요일 오후. 서울에 도착하여 집에 들어오는 길에 방학동에 있는 꽃집 '영이네 집'에 들렀다. 크리스마스인데 꽃 한 송이 없는 삭막한 집이 맘에 걸려 포인세티아 세 화분과 칼란코에 하나를 샀다. 단 돈 만원! 말려도 소용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는지 체념한 보스코는 묵언수행중.
앙증맞은 빨강 포인세티아와 우아한 분홍 포인세티아의 아름다움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 노랑색 칼란코에는 혼자서 거만하게 뽐을 낸다. 내년 봄에 화분을 갈아주고 여름을 나면, 성탄절엔 청년이 된 모습을 보리라. 그렇게 자란 화분이 휴천재에 금년에만도 10개가 넘는다. 그러다 어느 해처럼 ‘온실가루이’ 습격을 받으면 한꺼번에 쫄딱 망하기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유일한 '최애 쇼핑 종목'은 꽃, 그것도 화분으로 사는 꽃이다.
꽃도 사왔겠다, 딸들과의 송년 모임도 우리 집에서 가질 것 같아 휴천재에서 꾸며서 싣고 온 작고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에 '나폴리 말구유'를 꾸몄다. 해마다 지리산과 우이동 두 곳에 차려지던 트리가 올해 서울집은 간이식으로 줄었다. 축제와 명절을 성대하게 지내는 일은 보스코가 살레시오에서 교육 받은 취미이지만, 내가 나이 들면서 하나 둘 간이식으로 줄어감을 실감한다.
월요일 한신여동문회 정기총회를 창동에서 갖는데,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성능교회에 있는 기살림 창동점에서 모임을 가졌다. 왕언니로는 김정희 언니가 남편 목사님과 함께 참석했고 이문우 언니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 했다. 약방을 하느라 바쁜 중에도 김삼자 언니도 잠깐 참석하여 늘 하던 대로 초콜릿과 타이레놀을 선물로 내놓고 급히 가셨다. 서로가 챙기고 살피는 마음은 대학 다닐 때부터 50년 넘게 변함이 없다.
2층에서 예배를 보고 회의를 하는 동안 형부는 아래층 카페에서 꼼짝 않고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얼굴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목사님으로서 마지막 걸음을 걷고 계시는데 그 얼굴이 그분의 삶을 기록한 자서전이다. 정희 언니가 형부에게 아기 돌보듯 챙기는 모습은 각자 보는 사람들의 눈은 다르겠지만 '그래 부부는 늙을수록 서로 저렇게 지극하게 보살피고 아껴야 하는 거야'라는 산 교육이었다, 여동문회 총회에 와서 보너스로 받아가는.
얼마 전 남편과 사별한 문우 언니의 눈치를 보며, 언니 역시 남편을 하늘처럼 모시던 기억이 새로워 "아마 지금 쯤은 해방감을 느낄까? 그때를 그리워할까?" 혼자 묻는다.
여동문회에서 후배 여학생을 돕기 위해 장학계를 하고 그 중 한 몫은 장학금으로 내놓고 있다. 예전에는 꾀 큰돈이라고 생각했던 돈이 이젠 푼돈이 되었고, 그 돈을 받았다고 고마워하는 학생도 없단다. 더구나 한신대학에서도 이제는 목회자가 되려는 학생이 확 줄어 신학을 전공하려는 모든 학생에게 전액 장학금을 주고 있단다.
가톨릭에도 신학생이 점점 줄고 수도회도 마찬가지인데 개신교도 '한집 건너 교회 하나' 시대는 끝났단다. 그렇다면 지금 젊은이들은 무엇을 추구하며 무슨 목적으로 살아갈까? 짐작이 안 간다. 다만 세계는 다양해졌고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이고 가치 기준도 너무 달라져 우리 세대에게는 혼돈의 시대처럼 보인다.
오늘은 보스코가 수면무호흡증으로 4년간 양압기 처방을 받던 곳을 은평성모병원에서 보훈병원으로 바꾸었다. 석 달에 한번 은평으로 흉부외과엘 가는데 심장 스턴트와 암수술을 받은 보훈병원 한곳이면 더 편리할 듯했다. 그러고 보니 보스코는 나이 들면서 전체적으로 '호흡기'에 문제가 생기는데, 나처럼 수족에는 이상이 없는 것을 보면 하느님은 나이에 따른 병고도 적당히 섞어서 나눠주시나 보다.
어렵사리 예약한 '정신건강학과'(은평에서는 '호흡기내과'였다) 여의사는 보스코가 수면검사를 받은 지 4년 넘었으니 다시 받아보라는 진단을 내려 1월 6일로 검사를 예약하고 돌아왔다. 양압기 회사의 담당자도 바뀌었다.
오늘 오후에는 우리 동네 ‘서울봄연합의원’에 가서 내가 진주에서 받은 MRㅣ검사 결과를 보여주고 다리 수술에 대한 조언을 구하니 '아프지 않으면 수술 말고 그대로 살라'고 한다. 내 말이 그 말임을 확인하고자 병원 한 곳만 더 가보고 이대로 견디기로 작정했다. 엄지손가락을 수술하고서 지금 얼마나 후회하는지 모른다.
엄청난 예보대로 오늘 오후 3시부터 눈이 내렸다, 퍽이나 인색하게. 올 겨울 첫눈인데 우리 동네 옹색한 비탈길에 눈까지 내리면 차나 사람이나 벌벌 긴다.
45년전 우리가 만든 공터가 예쁜 공원으로 다듬어졌다
무려 2년을 두고 ‘3080 개발’로 아파트에 살아 보겠다던 마을 사람들의 가난한 꿈이 무너진 듯하다. 이 지역 최대 지주(구역 토지의 51% 소유)인 덕성여대가 자기네 '절대산지'까지 국가가 매입하지 않으면 반대한다는 오기를 부려 '3080 덕성여대 후문일대' 지역은 12월 6일자로 탈락되었단다.
대부분 나이든 주민들은 '차라리 잘됐다!'는 안도감인데 젊은 세대는 아파트 꿈이 깨져 허탈해 한다. 나야 지난 45년을 살아온 단독주택에 계속 사는 일이 결코 나쁘지 않지만 우리 아들들은 두 늙은이가 뜰과 나무를 가꾸고 집을 거두는 수고를 걱정한다.
첫 눈 치고는 사래기처럼 내리다 만 눈이 흩뿌려진 정원에 서서 담너머 뒷산을 보면서 아주 익숙한 오랜 풍경에 가슴을 쓸어 내린다. 우리가 반세기 누려왔던 그 아름다운 시간과 자연의 소중함을 깜빡 잃어버릴 뻔했다는 따스한 안도감이 밀려와 흰 눈으로 가슴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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