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3년 3월 9일 목요일. 황사 일고 바람 센 날.
우리 동네는 국회의원이나 군수 선거보다 더 주민들이 관심을 갖는 게 조합장 선거다. 그만큼 농협이 주민의 삶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 권력이 실질적으로 큰 힘으로 작동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번 선거에는 두 명의 후보가 나왔다. 외모부터 선비다운 자그마한 후보와 럭비 선수같이 우락부락한, 체대에서 럭비라도 할 성부른 사람이다.
럭비 선수 후보는 ‘대학가는 자녀를 둔 부모에게 학자금 100만원을 주고, 조합원 생일에 축하금 10만원을 주고, 노인들에게는 건강검진 비용 30만원씩 주겠다’는 선심 공약을 걸었다. 다른 선비 후보는 지금까지처럼 사고 안 치고 열심히 하겠단다.
‘사고 안 치고 하겠다’는 게 설득력을 갖는 건, 잘 나간다고 다른 동네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던 이웃 마천농협이 조합장에게 싹 털리고, 조합장은 감옥 가고(‘남이 감옥에 가려거든 경제사범으로 가라’고 여자들이 부러워한다는 그런 남자) 조합원은 빚더미에 앉았다가 작년에 겨우 빚을 털었단다. 그러니, 사고 안 치는 게 미덕이 되는 그런 자리가 농협 조합장이다. 얼마나 이권이 걸렸으면 동네 할매들까지 누구누구를 찍어야 한다고 침을 튀긴다.
아무튼 나는 5시 마감에 5분 전에 가서 투표를 했다. ‘뭔가 자꾸 주겠다’는 사람은 무슨 사고라도 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참았다. ‘그래,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그게 우리 농민을 돕는 길이다.’ 바로 윤아무게에게도 우리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마라!'와 같은 심경으로 '사고 안 치겠다' 공약한 후보에게 한 표를 찍었다.
봄은 봄이어서 그 동안 날씨가 차서 한참을 주저하던 휴천재 매화도 활짝 피었다. 배고픈 새들이 꽃잎으로 라도 허기를 메우는지 많이도 날아온다. 마당의 수선화와 크로커스도 첫 봉오리들을 올렸다. 산보길에 '생강나무' 향기가 너무 짙어 몇 가지 꺾어다 식당채에 꽂았더니 그 향내가 얼마나 화려한지! 지리산에서도 맨 먼저 꽃을 피우는 꽃나무다.
오늘은 계속해서 미세먼지가 뿌옇게 깔려 산책하기에 꺼림칙하다. 거기에 바람까지 불면 보스코는 ‘날씨가 날 돕는군. 산보하기 싫은데.’ 하는 표정으로 마당 한두 바퀴만 돌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엊그제 우리 막내 호연이가 실어다 준 실내자전거라도 타라 했더니 ‘좀 탔다.’ ‘몇 바퀴?’ ‘한 30바퀴.' 기가 막혀서 쳐다보니 자기는 두발자전거는 물론 세발자전거도 타 본 일이 없단다. 넷플릭스 마음껏 관람하면서 실내자전거 바퀴를 돌릴 꺼라는 내 기대는 물거품이 되는겨?
오늘 아침 빨래를 세 통이나 돌렸다. 손님이 한 번이라도 쓴 침구와 수건들은 다 빨기에 어지간히 많은데, 펜션 하는 사람들은 이 노동을 어떻게 감당할까 궁금하다. 음식하는 일은 감당할 만하고 즐기기도 하지만 침구를 손질하여 다리미질까지 해야 하면 그 사람들은 무슨 특수기구를 쓰고 있나? 알 수 없다.
빵고신부가 팔보효소로 사순절 10일 절식 10일 보식을 하고 있는데 고로쇠 물을 차 대신 마시고 싶단다. 작년에는 인규씨가 고로쇠를 받으러 다녔기에 전화로 물어보았더니 '올해는 날이 가물고 춥지도 않아 평년의 반도 못 받았고, 갑자기 더워져서 나무들도 자신들의 싹을 틔우기 위해 물을 안 내놓는다.'는 설명. 누가 일러주지도 않았는데 저 미물들이 어디서 그 이치를 깨우쳤을까 기특하다, 탐욕스러운 인간들에게 헌혈을 하다 정작 자기 새끼들(새 잎)을 키워야 하면 물을 흘려보내지 않는다니...
오늘 오후에 남미 여행에서 돌아온 희정씨를 만나러 읍내에 갔다. 땅이 넓고 아름다운 자연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우리나라가 최고'라는 결론이 나오더란다. 그들의 가난이 제1세계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착취에서 왔다는 자각이 없으면 그저 불편하고 불쌍해 보일 뿐이다. 우리도 일본과 미국의 전쟁의 피해자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과거를 살지 않았던가? 악착 같이 피땀 흘려 이뤄 놓은 자랑스런 조국을 검사 나부랭이들이 엉망진창으로 망치는 꼴 도저히 보아줄 수가 없다.
그래도 역사는 열 걸음 앞으로 갔다가 아홉 걸음 퇴보를 해도, 한 걸음은 전진한 거라는 낙관적인 말을 하는 친구를 볼 때 한 대 쥐어 박고 싶다. 요즘 황사처럼 앞이 안 보이는 대한민국 정치 상황이 암담하기만 하다.
잉구가 구장네 논을 간다. 작년에 구장이 세상을 버리자 남호리는 너무 멀어 부인이 우리 집 앞 논을 갈아 고추밭을 만든단다. 혼자 남은 한남댁의 고생이 좀 덜어지고 굽은 허리는 펴지기를... 죽은 사람은 죽더라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논밭이든 마음 밭이든 희망을 심어야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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