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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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이다. 하늘이 열리는 날이니 뭔가 시작한 날인데, 우리 둘에게는 인생의  새로운 막이 열린 날이다. 오늘이 개천절이고 군인주일이라는 건 아는데 오늘이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보스코를 보니 우습다


오늘 주일미사 제1독서(창세기 218~24)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아담이 혼자 있는 게 좋지 않아서',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주신 얘기를 실었다. 아담을 잠재워 놓고 갈빗대 하나를 뽑아 여자를 지으셨다. 이 여자를 아담에게 데려가 보여주자 그가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감탄! 감탄!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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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등장에 저렇게 '부르짖을 만큼' 감격한 아담으로 총칭되는 남자들이 (임신부님의 미사 강론 말씀에 의하면)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80%행복한 인간관계’(가정, 자녀, 친구, 이웃), 20%, 출세, 성공을 꼽고서는 ‘정작 실생활에서 어디다 정성을 쏟는가?’ 묻는 질문에는 삶의 90%, 출세, 성공을 위해’ 쏟고 겨우 10%가정, 자녀, 친구, 이웃을 위해할당한다고 대답하더란다.


고난회 서신부님의 만화(2013): 친구들은 나더러 포대기로 남편 업고 뛰더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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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보스코에게 기대하는 메시지를 못 들은 터라서 오늘 점심 후 정자에 앉아 한담을 나누다 '오늘이 무슨 날이에요?' 슬쩍  물으니 '그걸 왜 묻지?'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 "'우리집 남자'에게 나를 데려다 주신 하느님! 오늘이 당신께서 나를 인계하신 날임을 저 남자가 비록 기억 못하더라도, 1973년 그 이듬해부터 48년간 변함없이 기억 못한 일을, 이제 나이 80에 새삼 가르쳐 무엇합니까?" 그간 줄 것 다 주신 하느님도 내 어처구니 없는 이 어리광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실 게다. 


주일미사 후에 신부님 오누이와 미루, 그리고 스.선생 부부가 휴천재 네 식구와 오랜만에 아침을 함께 먹었다. 체칠리아는 아직도 백신 후유증으로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다지만 휘청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아이처럼 70년 동안 그녀를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다. 그미는 '골골팔십'은 기본이고 우리 중에서 제일 명이 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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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토요일에는 보스코랑 아래 텃밭 풀을 맸다. 그는 예초기를 돌리고 나는 낫으로 풀을 벴다. 바랭이가 한참 꽃을 피우려는 참이니 씨를 맺기 전에 처리해야 내년 고생을 던다. 무 심은 이랑은 잎이 너무 무성해 바람이 안 통해서 떡잎을 지며 '무 뿌리가 앉지를' 못한다. 이번엔 동네 아줌마들의 지청구를 듣기 전에 스스로 무잎을 뜯어냈더니, 내 텃밭 농사 싸부님(아니 '싸모님')노릇을 하는 드물댁이 "첨 농사지을 땐 우습지도 않더니 이젠 제법"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주일에 찾아온 미루에게도 루콜라를 뽑아 주고 상추와 오이, 고추를 챙겨주는 재미가 텃밭농사의 진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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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 '마늘 언제 심을껴?' 하고 채근하는 드물댁이랑 정자에 앉아 마늘을 쪼개서 텃밭 마지막 이랑에 멀칭을 하고 마늘을 심었다. 구멍구멍 마늘을 한 쪽 씩 박아 넣는데도 한 접 반은 실히 든다. 좀 더 심자는 드물댁의 말에 씨마늘을 구하러 '잉구네'에 갔더니 엄니가 "나도 함양장에서 마늘을 두 접 사다가 심었다. (작년 농사에) 열 접도 더 되는 마늘을 '순심이 다 갖다 줘뿌리고', 부아가 나서 올핸 나 고만 심고 말란다."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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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니의 입에서 '순심이'로 통칭되는, '잉구네 여자들'(동네 혼자 사는 아짐들의 힘든 농사일에서 일손을 돕는, 밭을 갈아주거나 무거운 걸 트럭으로 실어다 주는, 유일한 남정이 '친절한 잉구씨'다) 속에 나도 들어있다는 말투여서 슬그머니 죄송스러웠다


김원장님께 받은 잘생긴 마늘도 씨가 되었으니 내년 봄에 얼마나 캘까 걱정 반 기대 반이다. 마늘 농사는 한 접 심으면 적어도 다섯 접은 돼야 하는데 씨마저 까먹지는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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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의 상습적인 무심증(無心症)을 알고 있던 '세째딸 귀요미'가 저녁에 우리 둘을 동의보감촌 삼청각으로 초대하여 작고 예쁜 결혼 축하 케이크를 잘라주었다미루가 나서서 결혼기념일을 챙겨준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그미가 촛불을 켜고서 '아부이'더러 '우리 어무이'와 결혼한 소감 한마디를 주문하자 "결혼을 하고 나니아내가 생기면서 의식주(衣食住)가 다 해결되더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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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감싸줄 옷이고, 그의 생명을 유지시켜 줄 음식이며, 그가 머물고 쉴 집이 되었다는 얘기. 그에게 나는 모든 것이었다는 말이겠다. 내게도 그는 마찬가지다. 두 아들에게서도 축하 전화와 문자를 받으며 "둘이서 (안 싸우고?) 사이좋게 사셔서 저흴 안심 시켜 주시니 고맙다"는 치하도 들었다


로사리오성월에 들어선 10, 미루와 셋이서 구절초가 만발한 동의보감촌 언덕길을 돌면서 성모님께서 두 집안에 베풀어 주시는 모든 은혜에 감사의 묵주알을 굴렸다. 서늘한 밤바람에 구절초 향이 은은히 우리를 감쌌다. 서녘엔 금성, 남쪽엔 목성과 토성이 유난히 반짝이는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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