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30일 목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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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수세미 노랑꽃이 간밤에 내린 빗방울 수정 귀거리를 하고 활짝 반긴다. 자연의 수선스런 몸단장이 끝나면 태양은 빗속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익은 과일이나 고추, 토마토는 비 맞은 자리에 햇볕을 받으면 껍질이 터진다. 아침 햇살이 텃밭까지 다다르기 전 가지 오이 호박 토마토 고추를 바구니에 부지런히 따 담는다. 상추와 호박잎은 보스코가 좋아해서 매일 식탁에 올린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풍요로움에 흠뻑 빠져 사는 재미, 지리산 휴천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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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차가 속을 썩여 생각이 많아진다. 17년간 정든 사이니까 그냥 고쳐가며 굴러다닐 때까지 쓸 것인가? 새 차를 산다면 하이브리드를 살지, 전기차를 살지, 중고차를 살 것인지, 새 차를 살지? 머리가 과부화 걸릴 만큼 복잡하다. 열 사람에게 물으면 열 가지 각기 다른 생각을 말해주고 내 생각도 그때마다 널을 뛴다.


계기판에 붉은 경고등이 들어온 부속을 구해 놓았다는 연락이 오기에 우선 어제 오후에 읍내에 나갔다. 앞이 안 보이게 비가 쏟아지는데, 기술자 둘이서 열 대가 넘는 차를 고치고 있어 내 차례가 오려면 당당 멀었다


그 시간에 짬을 내어 보스코의 태블릿(내가 10여년 쓰다 물려준 것) 충전이 전혀 안 되어 남원까지 A/S센타를 찾아갔다. 점검을 한 아가씨가 배터리만 아니고 메인 보드까지 모두 고장이 났다고, 고치는 비용이 25만원 넘게 든다고, 차라리 새 걸 사는 게 합리적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빵고 신부도 보스코도 고치지 말고 그냥 오라고 했다


빗속을 달리면서 골병든 차를 몰면서 불행만 아니고 가전제품의 고장도 한꺼번에 단체로 오는구나!’ 싶고, 그래도 사람들은 성하니 그것으로 만족해야겠구나 하며 위안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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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읍으로 다시 돌아가서 경고등 부속을 바꾸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람 놀리듯  경고등이 또 들어온다. 나도 오기가 생겨 차한테 협박을 했다. '네가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성싶으냐? 네가 길에서 완전히 퍼질러 앉아 레카차에 끌려갈 때까지 탈 테니 각오 톡톡히 하라구!'


호천이가 엄마가 모셔진 미리내 실버타운의 하늘문’(납골당)엘 다녀 왔노라고 전화했다. 간 길에 이모가 입원하고 계신 효도병원에 찾아가 그간 엄마 때문에 낯이 익은 간호사들에게 백신 2차 다 맞았다는 증명서를 보여주고, 코로나 즉석 검사를 하고서, 이모를 면회했단다. 다행이라고 할지, 폐암 말기인데도 별 통증이 없는 듯 했고 이모는 이미 아무런 인지를 못 하시더란다. 일 년 전만 해도 그렇게 기억력이나 생각이 명료했던 노인이 하루 아침에 된서리에 호박잎 주저앉듯 변하셨더란다. 모든 사람이 저렇게 자신만의 죽음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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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상에 앉은 보스코를 바라보며, ‘저이는 절대 죽지 않을 것 같은이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서강대에서 '철학적 인간학'을 가르쳐온 보스코는 이 신념이 인간의 사후 불멸을 입증한다고 가르쳐 왔다. 배가 고프면 먹을것이 있다는 표요, 목이 마르면 마실것이 필요하다는 신호이듯이 생자필멸의 이치를 알고 주변에서 무수히 목격하면서도 나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코 안 죽을 것 같은 이 신념이 창조주께서 인간 심저에 넣어주신 확신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제정신으로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얼마나 더 힘들까?


유무상통 효도병원 간호사들이 호천이를 유난히 반갑게 맞아주어 그게 궁금하더란다. 자기들 내부통신문에 올해 최고의 러브스토리’로 호천이가 엄마와 함께 하는 장면들을 사진으로 올렸노라는 설명을 들었단다. 코로나 사태에서도 부모와 영이별하는 길에 극진한 효도의 손길로 엄마를 붙드는 아들의 모습이 보기 드물었나보다. 엄마가 유무상통에 계시던 지난 20년간, 우리 다섯 형제가 한 달에 한번씩 번갈아 찾아뵈었으니까 그곳 실무자들이나 노인들은 매주 자녀의 방문을 받는 노인으로 엄마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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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는 동네 길을 확보 해 달라는 민원을 주민들과 함께 낸 보스코의 민원을 확인한다면서 군청 직원이 다녀갔다. 문정리에 새로 들어온 주민이 도로의 절반에 해당하는 토지를 기부 채납할 테니 차량이 통행 할만큼 도로를 확보해 달라는 민원을 올리자는 제안이 있어 보스코가 나선 참이다. 


주민 요청에 군청 공무원은 도로 부지 전체를 기부채납 받지 못하면 길 못 내준다는 통보를 하러 온 길이었다. 국민을 상대로 공짜로 땅을 먹고 도로 신설을 무슨 시혜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서울에서는 1980년대까지 통하고 사라지는데 이곳에서는 2021년에도 여전하여 도시와 시골의 간극이 40년 가까움을 보여준달까? 아무튼 우리는 이길 때까지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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