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9일 목요일. 맑음


오랜만에 해를 본다. '해가 저렇게 생겼구나!' 긴 장마에 몇 번이나 썩혀버리고 남은 붉은 고추를 테라스에 널어 썬텐을 시키고, 물이 좋아 부쩍 커버린 가지는 한아름 따다 배를 갈라 정자 처마밑 대나무 가지에 걸쳐 널었다. 지금이야 흔하니까 볼품없지만 정월 대보름에 들기름에 볶아놓은 가지나물은 고기보다 더 맛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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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네 방 앞 찬란한 보라색으로 피는 해피블루에 얼마 전부터 검정호랑나비가 날개를 접고 꿀을 찾는가 싶더니 알을 까 놓아 애벌레가 바글바글하다. 2층 난간을 감고 부지런히 기어올라 이제야 한시름 놓는 수세미 잎에도 건방지게 머리를 발딱 쳐드는 애벌레들도 그 호랑나비들의 사생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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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안주인이 아끼는 배추라고 걔들이 봐줄리 만무. 요즘 아침마다 텃밭에 내려가 배추속을 들여다 보며 잡아내도 애벌레들의 숫자는 줄지만 일망타진은 언감생심아침내 쭈그리고 앉아 배추벌레를 잡는다. ‘그게 먹으면 얼마나 먹겠다고 그 고생이야?’ 하지만 걔들이 배추를 안방 차지하고서 들어앉아 버리면 김장 배추는 속이 텅비고 껍질만 남는다. "자연과 벌레와 나눠먹으라", 도사 같은 말씀을 하는 우리집 남자도 정작 김치에서 고갱이만 찾아 먹는다


제법 자라 오른 무를 솎았더니 한 소쿠리 되어 고추를 갈고 삶은 감자를 갈아 넣고 김치를 담갔다. 구멍마다 씨앗 세 알을 심어 이번에 한 뿌리씩 뽑아냈으니 추석 때 한번 더 솎아 김치를 담그면 추석 김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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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를 잡고 있으니 드물댁이 지나다 들여다보며 약을 팍 쳐뿌려.’ 한다. 참 현실적이다. 두 아낙이 배추속을 뒤져 벌레를 잡고 있으면 드물댁의 라이프스토리가 펼쳐진다. 젊어서 간난이 업고 뒷산 고개 넘어, 산을 서너개 넘어, 함양장엘 가곤 했단다. '돈이 엄서 시엄씨가 제상에 올릴 끼라고 사오라는 것만 언능 사고, 국시 한 그릇도 몬 사먹고' 갔던 길 되짚어오는데, 골짜기 폴섶이 폴삭거리더란다. 어둑해진 시간 그래도 동무가 있어 정신 차리고 내려다 보니 옆동네 영감탱이가 술에 취해 갈대를 잡고 씨름을 하더란다. 여자는 아기 업고 장을 다녀와도 국수 한 그릇 못 사 먹고 주린 배로 한 바구니 이고 돌아오고, 남자는 장날이면 한 잔 거나하게 걸치고 맨 손으로 담뱃대 흔들며 돌아오던 시절 풍경이다.


어찌나 배가 고프던지 집에 들어서자마자 애벌 삶아 놓은 보리밥에 고추장 비벼 허기진 배를 채우니 정신이 났고 그래도 애벌 삶은 보리를 한번 더 삶아 저녁상을 올리니 시엄씨가 밥 늦었다고 죽어라 욕을 하더란다. 어찌나 부화가 나던지 "내 다시는 읍내장에 안 갈 끼라."고 어깃장을 놓았단다. 그 뒤로는 조상님 젯상에 들나물 반찬에 보리밥 고봉으로 올리고서 우리가 사는 게 요꼴이라 허는 수 없소. 잘 얻어 드시려면 우리 자손들 좀 잘 살게 해주시구려!’ 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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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비가 와서 심란한데 거믄굴때기(검은굴댁)가 찾아와 함께 누워 니약니약했단다. 그러다 거믄굴때기가 느닷없이 "당신, 서방한테 맞아 본 일 있어?" 묻더라나. 자기는 시엄씨가 난데없이 "저년 맘에 안 들어. 좀 쌔려주라." 하면 남편이 일 없이 자기를 쥐어 박더란다. 비는 오고 과거 남편 생각이 나자 괜시리 옛날이 서러웠나보다. 그런 남편인데도 새록새록 남편생각이 나고 "지금이라도 살아오면 내가 업고 다니제." 하더라나. 이 동네에선 보기드문 부부애의 흔적이다. 


드물댁은 용감하게 "배 골코는 살아도 매 맞고는 몬 산다. 남편이 패면 쥐어쌔려버리고 집을 나가는 일이 있어도 그리는 몬산다!" 했단다. 당시로 말하자면 여성 독립선언’이다. 이렇게 둘이서 배추벌레를 잡고 있노라면 드물댁의 조곤조곤 입담에 여성대하소설이 쓰여진다. 정말 언어는 여인들을 위해 창조되었고 모든 여인의 삶은 열두 권 대하소설에 담길만큼 추억이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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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문섐이 우리가 너무 보고싶어 오후에 오겠단다. 다섯 시가 다 돼서 온 김원장님과 문섐은 두어 달 밀린 얘기로 밤 늦게까지 머물다 10시가 넘어서야 어두운 밤을 헤치며 임실로 돌아갔다


때마침 미루네가 키우던 오골계를 잡아서 이사야가 휴천재까지 배달해 준 덕분에 손님 대접을 잘했다. '팔보식품' 공장터 마당에서 놀던 오골계인데 이사야가 '인터넷을 보고서' 닭을 잡았다는 설명. 오골계의 수난도 인터넷과 연동되어 있다니... 말하자면 세상 전부가 함께 엉켜서 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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