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5일 일요일. 가랑비가 온종일


비는 오늘도 지칠 줄 모르고 내린다. 올해는 가을을 맞는 비가 미리 와서 여름을 바향하고 있어 이러다 이 비와 겨울을 맞바꿀 듯하다. 일주일 전 쓰러지신 살레시오회 박병달 신부님이 93일 금요일 오후 9시에 91세의 일기로 선종하셨다는 부고를 빵고 신부가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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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일찍 보스코가 광주 신안동 수도원으로 문상을 가는데, 가는 길에 전주에 들러 범선배 신부님을 찾아보겠단다. 기사는 말없이 사장님일정과 뜻에 따라야 한다. 시편 150편을 상해(詳解)한 아우구스틴의 장장 220편의 해설과 강론을 모두 번역해내려는 보스코의 야심은 본인도 한 5년은 걸리리라 예상하는 듯하다. 자기 생애 마지막 역작으로 마무리하고 싶단다. 그 일로 로마에서 성서신학을 연구하셨고 광주 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지내신 범신부님과 의논할 일이 있다기에 전주 서남 구이로에 있는 신부님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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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신부님댁은 앞이 훤히 열린 들을 눈앞에 펼쳐놓고 있다. 앞으로는 막히는 곳이 없어 답답하지 않네요.’라고 했더니 바로 건너편 나즈막한 건물들을 가리키면서 전주교도소라고, 아파트 발치에 있는 건물을 손가락질하면서 장례식장이란다. ‘잘하면 건너편 건물로 가서 국립호텔 신세를 질 수도 있고’, 하늘 길로 들어서면 바로 앞 건물에서 다 해결해줄 꺼요.’란다


중세 때는 해골을 책상머리에 두고 묵상하는 성인 성녀들 그림이 많이 전해오고, 썩어가는 자기 몸을 구더기가 파먹는 그림(부자들은 조각상)을 곁에 두고서 죽음을 묵상하던 염세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문화도 있었다지만 교회가 죄와 죽음의 공포로 사람들을 협박하던 시대가 떠오른다.


바로크시대의 영성을 반영하는 기괴한 조각품(집안에 설치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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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죽음을 늘 생각하고(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진지하게 산다면 나쁠 것도 없지만 현대교회는 (나도 5월에 100세 엄마의 요양원 임종을 지키면서 깨달은 바이지만) 인생에서 죽음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mortality is a gift), 죽음 때문에 삶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보스코가 퍽 오랫동안 호스피스 전문가 교육에 강연을 나가서 강조하던 바도 이 주제였던 것 같다. 그가 한국 호스피스 운동의 효시가 된, 퀴블러-로스의 인간의 죽음(Death and Dying)을 펴낸 것이 1979년 그러니까 40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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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에 광주 신안동 수도원에 도착하여 성당에서 사제 박다두를 위한 연미사에 참석했다. 대학(경북대)을 졸업하고서 살레시오회 한국인 첫 입회자로 오셔서(1958년) 긴 세월을 열심히 사셨고 쓰러지셔서도 1주일 만에 돌아가셨으므로 (항상 그렇듯이 노인들의 죽음에는 젊은 수사들의 표정에) 애석함과 안도감이 함께 한다


조대병원 응급실에서 의사들이 여러 가지 연명치료와 수술을 하려 들자 박신부님의 조카 의사가 멀리서 노인의 고통만 더 가중시킨다며 모든 연명치료의 중단을 요구했단다. 우리도 그렇게 하기로 둘이서 이미 약속한 터요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확인증을 늘 지갑에 넣고 다니는 중이다. 나나 보스코도 죽음을 숭고하게 받아들여 편안히 주님 품으로 떠나게 해주길 바란다. 오랫동안 살레시오 중고등학교 교장으로 계셔서 문상 올 지인이 많을 테지만 코로나로 방문객을 극소화하고 있었다.


성씨 3형제 가족이 박신부님(그리고 노신부님)과 함께 찍은 사진(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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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부님은 만물박사이셨고 입회하시던 해(1958)부터 알아온 보스코를 각별히 아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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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와 가장 친한 수복씨도 문상을 와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몹시 노쇠해 보여 마음이 아팠다. 우리가 우리 얼굴을 못 보기에 친구 얼굴에서 우리 모습을 거울로 비춰본다. 우리에게도 남은 날이 적음을, 이렇게 떠날 날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우쳐 준다.


광주 간 김에 방림동에 있는 어머니 산소에 성묘하였다. 찬성이 서방님이 예초기를 가져와 말끔히 벌초를 하고 있었다. 64년전에 어머니가 묻힌 산 언덕 바로 옆자리에 금년에 봉선(유안)성당이 신축되어 사용 중이었다. 잠깐 방문한 성당의 주임 사제는 2008년 북한방문에 함께 갔던 변신부님이었다. 어머니 산소가 있는 기독교 묘지는 일제시대부터 있던 곳인데 방림교회가 매입하여 모든 무덤은 이장했고 그 터에 교회를 짓겠다면서 이장하라는 계고판이 몇 해 전부터 어머님 산소에 붙어 있다. 묫자리가 좋다 하여 버티는 중인데, 죽은 영혼이야 언제나 하느님 품 안에 계시는데 어디라고 나쁠 일이 있겠냐마는 약한 게 인간 마음이라 떠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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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산소에 성묘는 했는데 준이서방님 묘소도 찾아보기로 두 형제가 합의하여 용전 영락시립공원묘지로 갔다. 하지만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라 이미 납골 봉안소 건물은 닫혀 서방님을 볼 수 없어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오늘 주일에는 두 달만에 임신부님의 문정공소 미사가 있었다. 봉재 언니, 귀요미 미루와 이사야도 함께 오니 기쁨이 몇 배. 천국을 가도 이곳에서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곳이라니까 살아서 이미 우리는 천국을 살고 있는 셈이다. 휴천재로 올라와 아침을 먹으면서 한참 화담을 나누다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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