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1일 목요일, 겨울비

[크기변환]IMG_8549.JPG

아침 일찍, 서재의 마룻바닥 북쪽 끝까지 햇볕이 깊숙이 찾아든다. 겨울엔 이렇게 긴 빛줄기로 우리 추운 인생들 속살림까지 살펴 주심에 하늘에 감사한다. 7일이 입동이었고 겨울이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월요일 새벽부터 날씨가 한 행세를 했다. 지리산 하봉에 눈을 뿌리더니 오늘 아침 보니 휴천재 건너 와불산 머리도 회색으로 셌다.

기름 값은 오르고 날씨는 추워지는데 기름 탱크 계기는 바닥을 향해 달린다. 하루에 5cm씩 내려가고 있으니 1cm에 4리터 분량이니까 4 X 5 = 20리터.  하루에 20리터 기름을 불로 사르는 중이다. 그래도 실내 온도는 겨우 18~19도. 

[크기변환]IMG_8561.JPG

이웃 사는 도메니카는 우리 같은 노인들은 실내 온도가 22~23도는 돼야지 안 그러면 뇌경색이 온다고 성화지만 새벽 일찍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 보스코도 그 온도를 견뎌 내는데, 젊은(?) 내가 춥다 할 처지가 아니다. 어제는 올 첫 추위를 보스코도 느꼈는지 3층 다락에 올라가서 두꺼운 순모 세터를 찾아 입고는 ‘이젠 따뜻해.’ 한다. 추우면 난방 온도를 올리라고 해도 견딜만하다고 참는 애국자다.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두꺼운 내복으로 겨울을 나게 단련받으며 수도생활에서 몸에 익은 추위겠지만 체질적으로도 어지간한 날씨에는 침대에서도 이불을 걷어내고 배를 내놓고 잘 만큼 열기가 많은 체질이다. 다만 요즘은 자다가도 갑작스런 오한을 느낀다면서 전기 손담요를 찾기도 한다. 나이 탓인가 보다.

아무튼 쌀독이라도 가득 차야 덜 허기지듯, 오늘은 주유소 아저씨를 불러 380리터의 등유를 넣었다. 지난 2월에도 380리터를 탱크에 넣었는데 기름 값이 그 동안 리터당 700원에서 1000원으로 올랐으니 오른 만큼은 몸으로 때울 계획이다. 단독 주택이라 난방비가 아파트의 두 배도 더 들지만 겨울 세 달만 견디면 된다. 세 달 만 견디자!

어제 오후에는 얼마 전 일산 사는 내 패친이 선물해준 LAD 전등을 ‘긴 방’에 달았더니 해가 안 들어 늘 어둠침침하던 북쪽방이 대낮처럼 밝아서 좋다. 보스코가 전등 다는 모습을 사진으로 본 그 패친에게는 저 늙고 글만 쓰는 서생이 그런 일도 할 줄 아느냐는 듯 퍽 신기한가 보다. 

[크기변환]20211110_103947.jpg

텃밭 배나무 밑에는 어느 해부턴가 우엉이 자라왔다. 나무만도 한여름이면 굵기가 내 팔목 만큼은 될 터인데 얼마나 굵은 뿌리가 얼마만큼 깊이 뻗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캐낸다 해도 너무 굵고 심이 박혀 나물 해 먹기는 글렀고 찌고 덖어 차로나 쓸 게다. 보스코가 캐보겠다고는 하는데 뿌리가 깊어 잉구네 소형 굴삭기라도 불러야겠지. 

그래서 시골 아짐들이 꾀를 내어 비료 부대에 흙을 채워 모종을 심어 늦가을에 옆구리 낫으로 가르면 뿌리를 쉽게 채취할 수 있다. 어제 빗속에 한 부대를 갈랐더니만 내 새끼손가락 반 정도로 가늘디가늘다. 돈주고 샀더라면 버렸을 그 뿌리를 껍질을 까고 채로 썰어 한 접시 되는 ‘우엉조림’을 하는데 장장 서너 시간은 족히 걸렸다. 

[크기변환]IMG_8557.JPG

그래도 ‘내가 키운 내 것’이라는 정이 있어 저것들을 키우고 농사를 짓는다. 농사를 지으면 효율이나 경제성 같은 기존의 가치와 동떨어져 살게 되는데 남새 밭이나 꽃밭의 생명들의 존재 자체를 만나고, 그렇게 사랑하고 키우다 보면 세상이 전혀 달리 보인다. 휴천재 집안에 들여온 50개 넘는 화분(정확히 세어보니 66개)이 우리랑 한 식구로 겨울을 나면서 자기 존재를 자랑한다. 

오늘도 온종일 겨울비가 내렸고 밤이 오자 서재 창문의 유리가 마파람에 우는 소리를 낸다. 박노해 시인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2010 느린걸음)를 밤늦도록 읽으면서 민중에게 기울이는 시인의 곰삭은 사랑을 느낀다. 

[크기변환]20211111_214130(1).jpg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물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박노해, “그 겨울의 시”)

[크기변환]IMG_855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