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6일 화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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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송전 가는 길. 휴천강 옆으로 얼마 전부터 포클래인이 강 비탈을 내려가 잡목을 부러뜨리고 바위는 한쪽으로 밀어붙이며 여기저기 터를 닦고 있다. 세어보니 너댓 곳은 된다. ‘5일 근무를 하며 남은 시간을 보낼 별장을 마련하려는 도시인들의 발길이 이 먼 지리산 자락까지 미친다.


사람들과 복작이기 싫어 피해서 온 사람들은 더 깊은 곳으로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떠날 차비를 하리라. 시골에 살면서 도시인들의 못마땅한 꼴을 많이 봐 온 원주민들의 텃세도 덩달아 커진다. 우리는 1994년에 지리산에 집을 지었으니 30년이 다 돼가는데도 어떤 때는 원주민으로 어떤 때는 외지인으로 취급을 받아왔으나 이제는 그러려니다 내려놓고 살고 있다. 오후 산보길이 지리산 둘레길 4인데도 행인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둘레길 걷기 열풍이 잠잠해졌고, 지리산이 워낙 커서 많은 사람을 품을 만큼 넉넉해서도 그럴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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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오후 산보는 정말 놓치기 아깝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황금으로 물결 치는 들, 곳곳에 가을의 꽃주황색 감들이 나뭇잎을 다 떨군 채 홀로 남아 파아란 하늘로 찬란한 자태를 맘껏 뽐낸다. 또 하느님이 키우시는 들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름엔 그저 잡초려니 숨죽여 있던 풀들도 겨울이 오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자태로 창조주를 찬미하며 인간을 부른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가을이다.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홍해리, 가을 들녘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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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일찍 유영감댁 논에 콤바인 소리가 난다. 작년엔 유노인이 당신네 논두렁을 괭이로 파고 또 파서(논을 한 뼘이라도 더 넓힌다고) 논두렁이 다 허물어져 논에 물이 아예 없어 벼를 못 심고 한해를 묵혔다. 읍에 사는 아들이 나서서 봄이 되기 전 포클래인 굴착기가 논두렁을 정비했는데, 유영감님이 다시 논두렁을 파고 있어 내가 애가 타서 소리를 지른 적 있다. “아니, 아들은 돈 들여 논두렁을 고쳐놓았는데, 또 파면 어쩌시려구요? 작년처럼 또 농사 접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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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함에 놀란 노인이 괭이를 내던지고 버럭 역정을 내고는 더는 안 팠기에 올해는 벼를 심을 수 있었다. 마음을 졸이면서도 동네 최연장 어르신의 짓이라 지켜만 보던 아낙들은 일제히 나더러 잘했다 헸지만 유영감님은 경상도 남자로서 생전 처음 들은 아낙의 고함이었을 게다.


그런 사연을 거쳐 심긴 벼가 크고 여물었고, 영감님은 떠나셨으나, 그 나락을 걷는 기계 소리에 내 마음이 착잡하다. 그분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새참을 들고 내려갔다. 인규씨와 작은아들 도형씨가 논가를 베어내고, 커다란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엔 유영감님과의 긴 시간 쌓인 추억이 다 옆으로 누워 있다. 얼마나 가난한 인생인가! 그러나 우리의 주먹 만한 심장에 평생 그 숱한 인연으로 만나는 그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추억들을 간직할 수 있다니 삶은 얼마나 신비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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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오랜만에 도정엘 올라갔다. 하늘과 좀 더 가까운 동네라 가을이 먼저 내려와 나뭇잎에 물감을 곱게 들이는 중이었다. 모처럼 스.선생도 보고 체칠리아도 만나 내 인생의 가을 길에 친구들이 있음에 감사한다. 모든 만남이 은총이지만 우리 머리가 억새처럼 바래가는 시절에 미루가 꾸려주는 은빛나래단이나 우리 부부의 노경을 그토록 풍성하게 감싸주는 딸들이나 지리산 골짜기에서 자주 보는 주름진 얼굴들은 얼마나 고마운가! 더구나 이 코로나-유행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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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가 준 단호박으로 호박죽을 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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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당신 고구마밭에 철퍼덕 앉아 고구마를 캐던 태우할머니 곁에 가서 고구마 넝쿨을 낫으로 거둬 드리고 새로 캔 고구마를 얻어왔다. “고구마 좀 캐서 교수댁 좀 주고 싶어도 통 얼굴을 못 봐 애가 터졌다.”며 되레 당신이 고마워하셨다. 가을은 풍요롭고 넉넉한 계절이지만 그보다 더 풍요로운 것은 사람들이 아낌없이 내어주고 나누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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