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25일 화요일. 아침엔 소나기 오후엔 맑음


윗마을 시작으로 아랫마을 한길 옆 논까지 이양기 소리가 요란한 한 주간이었다. 이양기에 모판을 나란히 메기면 이양기는 모를 한 웅큼씩 쥐어 논에 박아 심는다. 못줄을 띄우고 남녀 농군 스무 명이 한 줄로 서서 허리 굽혀 펴기를 했을 노동을 이양기는 한 시간도 안 걸리고 해치운다. ‘바깥양반이 이양기의 바퀴가 안 닿는 가장자리를 경운기로 쳐냈고 안사람이 이양기가 남긴 빈 자리에 손으로 벼를 꽂고 나면 모심기는 끝난다. 그러고선 마냥 가을을 기다리면 되는 게 요즘 벼농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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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농기계 품삯, 비료값, 농약값을 빼고 나면 손해일 수도 있다며 국가에서 보조하는 직불금이 구멍을 메워준단다. 아무튼 '조상대대로 일쿠던 농토인데다 딱히 달리 할 것도 없으니 논농사를 짓는다'는데,  돈 벌기 위해서라면 논농사는 참 힘들다, 적어도 지리산 산골 다랑논에서는. 식량주권(食糧主權)을 고수한다는 애국심이라든가, 내 먹을 건 내 손으로 짓는다는 자긍심은 있어야 한다.


휴천재 맞은편 논에 모를 심는 구장은 사실 휴천재를 위해 잔디를 깔아주는 공사를 하는 셈. 모가 뿌리를 내리고 파랗게 자라 오르면 위아래 논빼미는 온통 푸른 잔디밭이고, 그 위로 바람이 스쳐가면 초록 물결이 파도 치는 풍경이 가을까지 이어진다. 노랗게 벼가 익는 가을은 또 얼마나 찬란한 황금 물결인가! 


유영감님 아들들도 대처에서 내려와 쇠약해진 아버지 논 농사를 거든다. 동네 왼편의 그 집 논들은 물을 채우고 써레질도 끝나 모만 심으면 되겠다. 휴천재 아랫논은 아들들이 굴삭기를 불러 축대를 새로 했으니 물을 끌어다 채우고 모를 심을 차례다. 해마다 구장네 논보다 열흘 쯤 늦게 모내기를 하면서도 "이르거나 늦거나 거두기는 매한가지여!"라는 영감님의 자신감이 그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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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어둑해진 시간에 로사리오 산보를 마치고 마을로 들어오다 허영감한테 들러 조의를 표했다. 그제 매장을 끝났지만, 늙은 아버지 혼자만 계시는 게 걱정스러워 함양 사는 막내딸이 함께 있었다. 삼오제를 지내고 간다고. 딸은 읍내에서 안경점을 하며 성당엘 다닌단다. 어머니가 많이 아팠을 때 성당에 모시고 가서 성체 앞에서 성호 긋는 법도 알려드리고 성모상 앞에서 어머니의 고통을 아뢰며 기도도 함께 올렸단다


대상포진이 나으면 교리를 받고 영세도 받기로 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대세(代洗)를 못 드려 너무 안타깝다는 따님의 하소연. 하느님이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작심하신 분이시니까 저 정도라면 상동댁을 이미 신앙인으로 거두어 주시고 남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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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감은 아내가 떠나던 날 아내를 임종(臨終)한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밤늦게 돌아가려면 날씨도 차운데 왜 나왔수?’ ‘나 죽더라도 아끼지 말고 맛난 것 사 먹고 옷도 깨깟이 입고 다녀요, 이발도 깔끔히 하고.’ ‘마누라 죽고 나니 초췌한 늙은이라는 말 듣지 말아요. 혼자 남은 영감들 보기 안 좋습디다.’ 자기 죽음을 예감했는지 지난 3년간 지병으로 고생하던 아내가 유언처럼 남기던 말을 우리한테 들려주면서 허영감은 목이 메어 눈물을 닦았다. 경상도 남자한테서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그러다 아내가 갑자기 몸을 비틀며 단말마에 드는데 신장으로 들어가는 동맥이 파열하여 병원에서도 아무 손을 쓰지 못한 채 삽시간에 세상을 버리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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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논빼미 빈 자리에 벼를 채우러 올라오던 구장댁한테 허영감님이 엊저녁 눈물을 보이더라는 얘기를 들려주자 그미가 대꾸하던 한 마디. “아이고, 앞으로 당혀 장장 멀었구먼. 지금 눈물은 눈물도 아니제, 갈수록 새록새록 더 서룰낀데. 그건 자기가 뗏장 이불 덮고 누워야 끝나는 눈물인기라!” 배우자를 잃은 서러움은 자기가 죽어 무덤에 묻히기까지 눈물이 마르지 않는 법이라는 저 아낙의 말이 참 속깊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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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 쪽으로 올라오는데 유영감님이 당신 집 돌층계에 물끄러미 혼자 서 있었다. 손수 만든 아치를 타고 꽃을 피운 장미덩쿨 아래서 저 영감님은 당신의 남은 미래를 어떻게 꽃 피우실까? 그분도 아내를 여읜지 10년이 넘으니까 황천으로 깨팔러 갈 날이면 육체야 당신 손으로 빨아 넌 저 낡은 옷처럼 벗어버리고 너울너울 춤추며 가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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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는 봉재 언니가 보스코가 좋아한다면서 죽순을 한 보따리 따가지고 산청에서 오셨다. 보스코는 어렸을 적 외갓집에 대밭이 있어 어려서부터 죽순을 맛들였단다. 언니는 당신이 모시던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서도 10년을 더 모시던 얘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셨다. 


오늘 점심은 도정 체칠리아네가 우릴 초대하였다, 도미니카랑 함께. 담 주 월요일에 코로나 백신을 맞는 나에게 몸 보신 시켜주마는 맘씨가 참 따뜻하다.


어제 오후에는 ‘잉구 어머니’ 처마 밑에서 따온 토종 옥수수 씨앗을 텃밭 빈 터에 심었고 오늘 새벽에는 보스코가 배밭에 마지막 소독을 했다. 배나무엔 적성병이 퍼질 대로 퍼졌고 자두는 도저히 기대를 못하게 잎이 말리고 열매는 다 지레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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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은 내가 엄마가 계시는 효도병원에 안부 전화를 하는 날. 엄마가 엿새 째 뉴케어 마저 안 드시고 링거로 연명하신단다. 지난 정월에 작심하고 모든 식음을 끊으셨다가 작은아들의 간곡한 호소에 지금까지 견디셨는데... 


둘째에게 소식을 전하며 이번엔 엄마가 가시겠다면 편히 보내드리자했더니 순순히 누나, 알겠어요.”한다. 삶과 죽음이 문 하나 양편인데 이 문을 닫고 저편으로 가신다 해도 더 이상 문고리 잡고 매달리지 말자는 생각이 요즘 굳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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