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4일 토요일. 맑음


수술 후 보스코의 행동이 좀 달라졌다. 작년에만 해도 배나무 가지치기를 언제 하려는가?’ 속이 터져 내가 잔소리를 해야 했다. 심지어 어떤 해엔 미루고 미루다 여름에 전지작업을 하기도 했다그런데 올해는 한겨울에 얘들이 잠들었을 때 하는 게 덜 힘들 거야라며 12월에 가지치기를 했다. 소독도 나뭇잎에 벌레가 생기거나 적성병 혹은 흑성병이 나타나야 마지 못해 하더니, 올해는 31일에, 나무가 잎을 틔우기 전 유황소독을 하겠다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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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나중씨가 왜 그럴까?’ 하다가 아마 모든 게(시간도, 식물도) 더 소중하게 느껴지나 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남은 날이 적다는 절박감에선지 새벽 두세 시에도 눈을 뜨면 서재로 가서 한자라도 더 옮겨놓겠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씨름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겠지. 그는 배나무를 소독하고 나는 곁에서 벗을 해 주느라파릇파릇 봄기운을 받는 쪽파와 세상 구경하느라 얼굴 삐죽 내민 부추에 물을 흠뻑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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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한번 발동이 걸리면 손에 들린 연장을 계속 휘둘러야 한다. 그제는 마을 길 우리 꽃밭에 겨우내 올라온 잡초를 뽑았고, 어제는 휴천재 마당 화단정리를 했다. 데크 밑 양지녁에 겨우내 무성하게 자란 풀도 모조리 뽑았다. 정자옆에 화단에는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는데 때가 된 줄은 어찌 알고 수선화들이 여기저기 무더기로 싹을 올리고 꽃봉오리들도 내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목이 마를까?’ 싶어 물을 듬뿍 주고 돌아서니 벌써 훌쩍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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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감동 옆 축대 밑의 땅은 기욱이네 고사리밭이다. 그러나 고사리는 드문드문 눈을 크게 떠야 보이고 대나무와 옻나무, 야생 복분자 넝쿨이 그 사나운 가시로 무섭게 세를 불리고 있다. 억새와 억센 잡초들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뽕나무가 사방에서 자라나 가시덩쿨에 감겨 질식 직전이고 기운 좋은 놈은 휴천재 울타리를 넘어 감동으로, 감동 이층까지 넝쿨을 뻗는 중이다. 손톱과 낫, 김원장님이 사준 연장을 들고 가 우선 너희 땅우리 땅경계를 지어주었다다섯 시간 노동에 온몸이 땀이 흠뻑 젖었고 손톱 밑은 까맣다. 까매진 손톱은 이제 농부의 시간이 왔다는 신호다.


청동오리들이 날아갈 때가 왔는지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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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의 살레시오 친구 중 미국인 선교사 권신부님 서품 50주년325이어서 22일에 그분이 사는 대전에 가서 축하해드리기로 했단다. 송신부님, 정신부님, 이정헌 선생, 보니파치오 선생 등 팔순 넘은 친구들 몇이 찾아가기로 했단다. 이 나이면 결혼했어도 모두 혼자만 참석하는데, 보스코는 아직도 내게서 독립을 못해 옆에 끼고 다닌다. 운전기사가 필요해서라고는 하지만 그건 핑계고, 갈수록 아내 의존증이 심해지니 어째 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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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의 단짝 친구 수복씨도 오라고 전화했지만 건강도 안 좋고 거동도 불편해서 외부 출입을 안 한다는 서운한 소식이다. 가까운 친구 중 더러는 떠나고 남아 있어도 신체적 불편과 고통으로 인해 삶의 질이 바닥치는 경우들을 종종 본다. 가톨릭 작가 이인평 시인의 시에서처럼: 


모든 사람들은 대본 없는 주연 배우고자신의 위치에서 날마다 새로운 연기를 하고 있으며/ 세상은 지금 연극을 공연을 하는 중이며/ 각자 맡은 배역이 다를 뿐이다....

인생은 한 토막의 짧은 연극으로/ 연기를 마친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질까?/ 자신이 원하지 않은 배역에 슬퍼하며 몸부림치는 배우들/ 남루한 의상처럼 마음과 영혼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연극을 하는 사람들/ 그들은 과연 이 세상에서 못다 한 연기를 저세상으로 가져갔을까?” (이인평, "인생은 연극"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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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2주일. 임신부님 남매와 미루네 부부가 오는 공소미사는 늘 활기차다. 미사 후 함께하는 조찬에서 미사성제가 아가페로 바뀐다. 오전에는 텃밭을 내려가 밭고랑에서 겨울을 난 갓을 괭이로 파내어 부드러운 속잎을 따서 갓김치를 담갔다. 셀러드 거리와 민들레도 캤다. 모두 강풍의 추운 겨울을 이겨낸 동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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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강원도 삼척에서 반핵투쟁에 선봉을 서고 있는 박홍표 신부님이 친구 찾아 삼천리를 돌다 휴천재에 발길이 닿았다. 미루네도 인사차 잠깐 들렸으나 할 일이 많아 저녁도 함께 못 먹고 급히 갔다. 저렇게 열 일하며 바쁜 것도 좋은 일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까. 보스코와 박신부님은 저녁식사 후에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국관과 교회관이 같으면 어디서나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된다.


박홍표신부님 은퇴미사에 다녀와서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635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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