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19일 일요일. 비오다 오후에 날이 갬 


금요일에는 얼마 전 친정어머님이 돌아가신 문섐 부부와 점심을 함께 하며 위로해 드리자고 실상사 앞에서 만났다. 울엄마랑 같은 양로원 유무상통에 오래오래 함께 계셔서 우리가 잘 아는 분이다. 아버님과 함께 계시다 먼저 돌아가신 후에도 말없이 우리에게 미소만 던져주시던 노인이었다. 문섐은 여섯 형제자매의 막내로, 대부분 막내가 그렇듯이, 엄마에 대한 극진한 애정과 애착을 품고 있었다


유무상통에서 뵙던 문섐 모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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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 대한 정이 깊을수록, 특히 딸들은, 그 시대 아버지들의 온갖 불합리한 언행, 여성 하대, 남초에서 오는 오만과 횡포에 대한 깊은 상처를 간직하게 된다적어도 한국 땅에서는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하느님의 구원을 보장 받는다. 그만큼 여자의 운명이 스산하다는 어느 농민운동가의 탄식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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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섐은 워낙 섬세하면서도 강직해서 불편부당한 일을 보아 넘기지 못하고 실천성도 남다른 분이다. 친정어머니 장례식에  '영정 사진은 남자가 들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깨뜨리고 당신 모친의 제일 큰 손녀딸에게 영정 사진을 들도록 가족을 설득시켜 조처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놀라운 결단력이다.


어머니가 떠나시기 직전 요양병원에서 집으로 모셔왔고 여러 날을 함께 지내며 마지막을 공유하면서 지낸 일을 회상하며 어머니의 임종을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하다. 내게도 울 엄마의 임종을 지킨 일이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무리 코로나 시대라지만, "여보세요. 간밤에 모친께서 돌아가셨어요."라는 전화를 요양병원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요 자칫 평생 무거운 바위로 가슴에 얹힌다어머님의 임종을 풀어 놓던 문섐의 얘기에서, 사람은 자신에게 소중했던 시간을 좋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운데 묵직한 슬픔에서 벗어나는 이치를 새삼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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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문섐 부부와 오랜만에 실상사 경내를 걸으니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가까이 오는 소리가 살아 있는 모든 중생에게서 들려온다. ", 이 겨울도 곧 지나가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봄이 벌써 사립문을 열고 들어선다.


토요일. 부산에서 살아온 스.선생님네는 겨울이 오면 해마다 우리에게 겨울 바다 특산물 '과메기'를 맛보여 준다. .선생이 과메기를 먹을 찬거리를 사러 읍내장에 가는데 미덥지 않으니 나더러 함께 다녀오라는 체칠리아 부탁이 있었는데, 문섐과의 점심 약속으로 내가 시간을 못 내자 스.선생 혼자 장을 봐 왔단다. 점심을 먹으면서 아내가 남편의 장보기를 이것저것 나무라자 "남자가 그걸 우예아노?"라는 대답에 식탁의 모두가 빵 터졌다


보스코라면 가게에 다녀오기는커녕, 장이든 슈퍼든 백화점이든 아예 따라 들어오지도 않는다. 우리 큰아들 같으면 부부가 나란히 다니며 일일이 가격을 살펴 물건을 고른다. 집마다 부부간의 행동 패턴이 다르면서도 그럭저럭 조율하며 사는 모습은 참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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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휴천재 마당에 잔디밭이 진이네 차량들 땜에 엉망이 된 것을 복원하겠다고 나서자 미루가 말리러 나섰다. 작년에 팔보식품 혜유당에 잔디를 심고 가꿔본 고생을 한 터라서 휴천재에서 저녁을 먹으며 보스코를 설득했다. 나도 함양농업대학 다닐 때 "시골에 귀촌해서 마당에 잔디 키울 생각일랑 절대 하지 말라."는 충고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앞산 뒷산이 다 푸른 녹지요 집주위 논밭이 푸른 뜰인 산골에서 '잔디 키우는 수고는 정말 미친짓'이라던 강사의 말도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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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주위에서 정말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을 간혹 만난다. 우선 남을 만나면 얼굴부터 찌프린다거나, 환대라는 건 도통 모른다거나, ‘고맙다’, ‘미안하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입 밖에도 못 내고 머릿속 사전에도 없는 그런 사람을 가까이 두고 살라면 두고두고 맘고생을 하게 마련. 그런데 어제 온 전라도 닷컴에 실린 어느 시골 할매의 이야기가 번쩍 내 정신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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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차만 된 시상이 어딨다냐? '내가 일 헌다' 하고 내 자신헌티도 생색내지 말고, 노는 것 맹키로 살아라. 어매는 이날 평상 남허고 다툴 일이 없드라. 조깨 거석하문 내 맘을 조깨 접으믄 되야. 혹간에 나쁜 맘이 들라 그라문 '꿀떡 생켜불어라' 그라제. 꿀떡 먹는 것 맹키로. 내가 좋으면 저 사람도 좋은 것이여. 내가 웃으믄 저 사람도 웃는 뱁이라 앞에 옆에가 모다 내 거울이여." 


오늘 주일 복음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힘겨운 가르침이었다. 저녁 7시에 함양 주임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셨다. 이번 수요일 사순절이 시작한다. 요즘처럼 국내에도 전세계에서도 주류언론들이 모든 국민들을 상대로 정치적 증오를 선동하여 원수처럼 패 갈라 놓고 그 증오를 고착시켜 보수정권을 창출하는 시대에는 알아듣기 더 힘들어지는 가르침이다


미사 후 간단한 다과로 마무리하고 찬바람에 어둠 속으로 떠나는 신부님 모습을 보며 자비의 주님이 나를 다독여 주신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내 얼굴을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저 할머니의 가르침이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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