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16일 목요일.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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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는 이슬비가 오더니 아침에는 싸락눈이 내린다. 둘이서 내다보며 싸락눈이 마악 몽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매화를 상하게 할까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영하 17도에도 그 여린 꽃눈을 지켜냈으니 이쯤이야 견디어 낼 게라는 격려의 말만 해준다.


휴천재 마루에 들여온 화분들은 햇볕과 거름이 좋아 여름처럼 한없이 자란다. 보스코와 나는 제라늄 떡잎을 떼고 웃자라거나 겹친 가지를 쳐준다. 둘이서 '이것도 따줄까?‘ ’이건 잘라줄까?' 손질하는데 영락없는 소꿉놀이다. 요즘은 깅기아난 향기가 온집안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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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겨울 하루는 해만큼 짧다. 아침기도와 (내가 분대장으로 붙이는 우렁찬 구령에 따라)티벳 요가(요가 안 하면 아침 없다!). 이층마루에서 아침상을 차려 하루 중 제일 걸게 먹는다. 마른 걸레질, 젖은 걸레질, 세탁기 돌리기와 빨래널기. 점심은 식당채에 장만하고서 한식을 차려 먹는다. 점심 먹고선 한두 시간 보스코를 걸리는 산보를 하면서 로사리오 한 꾸미를 돌린다. 저녁기도 후 떡 한 조각이나 빵 한 조각으로 과일과 차를 곁들여 저녁을 먹는다(세 끼 설거지는 '원칙적으로' 보스코 담당). 


동네 마을회관에는 온돌방이 두 개. 하나는 남정네들 방으로 찾아올 남정이 없어 늘 비어 있다. 그러나 여자들 방은 남정네 방과 같은 크기인데 한쪽에 조리대를 놓아 부엌으로 쓰고 있어 한결 좁다. 여나믄 아짐들이 한쪽에서는 대여섯이 100원짜리 고스톱을 치고 나머지 대여섯은 플라스틱 큰 물병에 물을 담아 베개로 베고 뒹굴뒹굴.... 마치 한 배 강아지들이 어미 곁에 오글오글 모인 모습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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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는 남정방도 따순데 그 방에 가서 넓게 누워계시죠.” 하면 이구동성 어데예?”라는 대답. '남자로 태어난 게 벼슬'이라서 비워 둬도 감히 범접을 못한다는 것인지, 좁아도 사람 냄새가 그리워 저렇게 달박달박이 좋다는 건지 모르겠다.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어무이 올라와서 함께 사십시다해도 ‘내 답답해서 아파트 몬산다!’는 아짐들이 세 평 반 짜리 방은 여나믄 명이 붐벼도 안 답답하다니 참 요상한 일이다.


아침 식사는 각자 집에서 누룽지 한 술 끓여먹거나 건느고, 겨울철 점심과 저녁은 모두 마을회관에서 먹는다70대에도 나처럼 남편 밥해줘야 하는 '아직도 주부'인 아낙은 나 포함 둘뿐. 쌀은 군에서 매달 40kg씩 나오고 반찬값은 노인회비 명목으로 1인당 얼마씩 관에서 나온다. 김치와 무, 배추, 시금치 등은 각자 집에서 조금씩 가져오고 요즘은 무를 넣은 동태탕을 자주 끓인다


난방비도 군에서 나오니 회관 방은 언제나 열대지방처럼 뜨거워 앉거나 누운 아짐들 얼굴이 모두 발그레 달아 있다. 저녁에 집으로 가면 전기장판 하나 깔고 이불속에 폭 들어가 추위를 견디니 이렇게 낮에 몸을 달궈야 한다. 밤이면 아직도 꽤나 춥지만 옛날에 산에서 나무 해다 군불 지필 요량이면 지금은 양반됐다고 자족하는 모습이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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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날씨도 꾸무룩하고 심심해서 나는 누룽지를 두 판 굽고 깨를 볶았다. 집안에 깨볶는 냄새가 가득하니 고소한 냄새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좋다. 외국에서는 집을 내놓을 때는, 누가 집 보러 온다면 맛있는 케잌을 구워 내놓는단다. 케잌과 커피향에 매료된 구매자가 쉽게 집을 계약 한다나


산봇길에 모니카네 텃밭에서 희아리져 버려둔 고추들을 바싹 마른 고춧대에서 서리해 왔다. 하나씩 수건으로 닦고 가위로 배를 갈라 씨를 빼고 다시 한번 말리면 두고두고 국이나 찌개 끓일 때 매운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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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는 멸치 다싯물을 큰솥에다 끓였다. 뭔가 들어가는 게 많다. 멸치, 밴댕이,북어대가리, 새우, 표고, 마른 청량고추, , 다시마, 양파, 대파, 사과... 눈에 보이는 맛있을 것 같으면 뭐든 다 넣으니 물 반 건더기 반. 국이나 찌개, 나물 하는데 쓰니까 한 달에 두어 번 끓인다우유팩 여닐곱 개에 담아 냉동고에 얼려 놓고 꺼내 쓴다. 다싯물 내린 건더기는 뒤꼍에 내놓으면 배고픈 길냥이들이 모여 잔치를 벌인다. 간혹 떠돌이개도 한몫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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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 보스코가 배나무에 퇴비를 주겠다기에 혼자 가면 심심할 것 같아 나도 따라 내려가 배추와 무를 뽑고난 빈 고랑에 김을 맸다. 배추 심을 때 북을 돋았던 이랑과 비닐은 그냥 두었다 감자를 심을 생각이다. 고랑에 부직포를 깔아 풀뽑기를 덜 하면 무릎 아픈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꾀를 내 본다


김 맬 때는 동무가 필요해 드물댁을 불렀다그미도 매일 마을회관에 끼어앉아있기 답답했던지 "땅이 얼었는데 어째 김은 맬락카노?" 라면서도 얼른 올라와 포실하게 녹은 봄 흙을 만지더니 얼굴에 생기가 돈다. 금년, 면에서 하는 노인일자리를 놓쳤으니 '휴천재 아르바이트'가 그미의 소일이 되겠다. 


봄이 와 날이 풀리고 땅이 녹으면 풀들만 신나서 너풀거리는 게 아니고 흙에서 살아온 모든 생명이 함께 기운을 살린다. 나는 봄이 좋은데 날이 길어져 할 일이 많아져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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