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14일 화요일. 맑음


어제는 날씨가 잔뜩 흐려있었다. 날씨가 흐리고 구름이 낀 지리산은 흑백 사진이나 수묵화 같은 형언키 어려운 신비감을 준다. 우리 서울집에 사는 사진작가 강레아는 비오는 날이나 눈 내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강원도로 달려간다. 그미가 담아 올리는 설악산의 흑백사진(https://www.facebook.com/rheakang88/?locale=ko_KR)에는 근접한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기에 숨이 헉 하고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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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겨레신문에서 그림 두 점을 보았다. 만화 일러스트레이터 명민호 작가가 자신의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 올린 그림의 반응이 뜨겁다. 첫번째 흑백 그림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튀르키예 군인이 무릎을 꿇고 전쟁 중 고아가 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다음 장에는 투르키예 실종자 수색을 위해 파견된 한국긴급구호원(KDRT)이 무릎을 꿇고 아이에게 물을 건네는 그림이다. 배경은 다르지만 서로를 돕고자 하는 마음은 맞닿아 있어 전세계인의 가슴을 울린다. 매일 실종자의 숫자와 사망자가 엄청나게 늘어나 우리들 마음도 흑백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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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이렇게 우울한 날은 몸을 더 움직여야 헤어나올 수 있다. 보스코는 며칠 전 내가 사온 유박비료를 배나무들 밑에다 어제 뿌렸다. 땅 파는데 힘들다고 그냥 유박을 뿌리고 퇴비로 덮어주겠다는데 그래도 안 주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 암말 안 했다. 사실 그가 수술받은 후에는 농사 짓던 배나무도 배꽃을 보거나 잘라버리자고 제안했었다. 내 얘기에 펄쩍 뛴 그가 행여 내 입에서 무슨 험한 소리가 나올까 작년말 예년보다 일찍 배나무 가지치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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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배추고 김장이고 다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으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호미를 들고 배추 고랑에서 풀을 뽑고 있었다. 자연이 주는 생명력과 회생력이 우리를 일으켜 세웠다. 아마 서울에 있었으면 보스코가 저렇게 빨리 회복되지는 못 했을 게다. 자연 속에서 느껴오는 '창조주의 약손'에 모든 걸 맡기고 우리는 그저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선물로 여기며 고맙게 살아가고 있다. 둘이서 바치는 아침기도에는 "새날의 빛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신 주여"라든가 "주님의 자비로 새날을 맞이하였사오니"라는 감사의 구절이 자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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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당근'에 들어가서 중고품을 찾는다. 어제는 '전기물걸레'가 떴기에 전화를 걸었더니 남원 산동이라면서 단돈 2만원! 우리 진공소제기가 30년 가까이 써서 물걸레질은 고장났고 부품도 단종되어 그곳으로 찾아가 귀촌한 여인에게서 사들고 돌아왔다. 


오늘 아침을 먹고 있는데 소담정 도메니카가 자기 앞집 고염나무를 베러 군청에서 사람이 왔으니 내려와서 보란다. 일꾼들만 하고 가버리면 그동안 그 나무를 베려고 들인 공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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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 우리가 처음 왔을 때 그집 돌담에 회초리처럼 가는 고염나무 한 그루가 자라올랐다. 그러다 해가 가면서 점점 굵어지고 돌담에서 튀어나와 담밑으로 오가는 자동차에 위협을 가했다. 더구나 고염과 그 곁 탱자는 하수구에 떨어지고 사방에 씨앗을 남기고 새끼를 쳐서 여간 골치꺼리가 아니었다. 주인에게 잘라 달라고 누차 부탁했지만 그 집은 헐린지 오래라 그곳에 살지 않는 주인은 관심조차 없다. 며칠 전 면사무소에 신고하여 오늘에야 군청에서 사람을 보낸 것이다.


고염나무 베는 김에 옆에서 사정없이 가지를 뻗은 탱자나무도, 요안나 아줌마네 집으로 넘어가서 거의 쓰러지려는 뽕나무도 잘라 달라 했다. 아줌마가 요양병원으로 떠나며 다시는 못 돌아올 그 집은 비어 있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른다. 우리 동네에 그런 집이 세 채나 된다.앞으로도 점점 늘어나겠지...


도정 체칠리아네가 엄니가 아파 부산에 갔다 한 달 만에 돌아왔다. 소담정도메니카도 상주에서 3주만에 돌아왔다. 늘 가까이 하던 이웃이 한동안 안 보이면 마음 기댔던 담벽이 흔들린다. 반가워서 휴천재에서 점심을 함께하자 했다. 그리운 사람들이기에 그만큼 할 말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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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만 먹고 헤어지기엔 너무 아쉬워 다섯이서 송전길을 걸었다. 날씨도 많이 풀렸고 강물도 제법 늘었고, 친구를 만난 우리들의 마음도 그만큼 넉넉해졌다. 다들 떠나지 말고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오래 살아야 할 텐데...


그 동안 보이지 않던 김 교수댁 황 카타리나의 시술 이야기로 안타까워하며 우리 더는 아프지 말자고 실없는 약속을 한다. 하나둘 어딘가 망가지고, 그러다 아주 많이 망가지면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야 할 나이들이어서 손에 손잡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떠날 처지라 이뤄질 수 없는 약속이라도 약속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래서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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