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23일 목요일. 흐림


수요일 아침 840분에 빵기네집을 나섰다. 권선호(Henry Bonetti)신부님 사제서품 50주년을 축하해드리려고 살레시오 수련 1,2,3기로 한솥밥 먹은 친구들 중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대전으로 모였지만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숫자다. 모두 80 고개를 넘었으니 '눈이 안 보여 바깥 출입이 어렵거나', '아예 병석에 들어 눕거나'  '세상을 버린' 사람들은 못 왔다. 왔어도 귀가 잘 안 들려 '뭐라구?'를 자주 소리치기도 한다. 그래도 젊은 날 고귀한 열정을 안고 서로 격려하며 살던 도반(道伴)들에 대한 우정을 이제껏 간직하고 있어 신통하다.


2020년 모임: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479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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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인 신부님, 정영규 신부님, 오늘의 주인공인 권선호 신부님, 이정헌 선생, 김일선 선생, 그리고 보스코. 단출한 숫자였다. 얼마 후 다들 떠나고, 누군가 혼자 남는다면, 떠난 사람이 더 행복할까, 남은 사람이 더 행복할까?


보네띠 신부님은 스무 살 청춘이던 1964년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60년을 보냈다. 한국 오기 전 홍콩에서 철학과를 이수한 적 있어 2000년대에는 중국 연변에 살레시오학교를 열었을 때 10여 년을 책임자로 보내기도 했다. 90년대에 광주 살레시오학교 교장을 지냈고 필리핀 살레시오 신학교 학장도 지냈다. 대전 공동체의 '거주사제'(은퇴 회원)로 있으므로 원장 위원석 신부(빵고의 수련동기)가 모시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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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부님은 삼량진에서, 정신부님은 마산에서, 이선생님은 정읍에서 모두 기차와 버스를 타고 모이셨다. 보스코더러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대전엘 가라 했더니 기어이 내가 운전한 차를 타고 가겠단다. 출퇴근 시간대와 딱 맞아서 대전까지 174Km를 무려 세 시간 반 걸렸다. 돌아올 때는 그보다 더 걸렸다.


가다 서다로 8시간 운전했더니, 밤중에는 발에 쥐가 나기도... 저렇게 밀리는데 서울 사람들은 왜 다 차를 끌고 거리에 나올까? 그 시간대에 교통 편한 대전을 굳이 나랑 가겠다는 보스코의 억지는? 내 하소연을 전화로 들은 큰딸도 미루도 "아부이가 어무이랑 같이 가고 싶어서 아니겠어요?" 라며 되레 편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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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한테 내가 하는 짓을 본 주변 친구들은 '시엄니 귀신이 붙어서'라고들 풀이한다. 어제도 시엄니 혼백이 내게 딱 붙어 "아가, 니 좋아서 그러니 어쩌 겄냐?"하셨을 게다. 심술이 나서 50년 함께 살아온 남자를 두고 문답 풀이를 냈다(일기 독자들에게).


[문제] 다음 항목 중 보스코가 아닌 것은?”  (여러 항을 골라도 됨)

① 무개념(실생활) ② 방안퉁수 ③ 성나중씨 ④ 손이 많이 가는 남자 

⑤ mono ⑥ 대책 없음 ⑦ 마누라 도착증 ⑧ 안면인식장애(특히 여자 얼굴)

[정] 해당 항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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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지리산으로 내려가고 싶은데 30년 만에 서울집 수리에 착수한 터라서 끝장을 봐야 한다. 비가 새는 흥부네 지붕을 고치기로 마음먹자 걱정이 한 짐이었는데 '지호아빠' 덕분에 그제 하룻 만에 멋진 '그린게이블'이 탄생했다. 어제는 테라스에 강시멘트를 다시 깔았다. 그리고 오늘은 종일 걸려 이층 도배를 했다. 서재, 침실, 다락 올라가는 층계를 도배했다.


차사장은 나더러 '이번엔 아주 보기 험한 곳만 도배하고 그냥 두었다 지리산 접고 올라오실 적에 전부 도배를 하자'고 제안하지만, 이왕 시작한 일 그냥 밀어붙이기로 했다. 자재와 인건비가 너무 올라 일꾼이 주인 사정을 걱정하는 처지다. 하지만 십여 년 후라면 틀림없이 더 비쌀 테니 지금 하는 게 경제적이라 여겨져 눈 딱 감고 !’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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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공은 차사장 동생이어서 유순하게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듣는다. 잡역을 담당하는 70줄 최씨는 원래 차사장의 아들 지호 밑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지호가 필리핀으로 펜션을 지으러 가면서 차사장이 데려다 쓴다는 일꾼이다


"요즘 젊은 애들은 8시에 와서는, 점심 시간 한 시간 빼고서도, 오후 4시만 되면 연장 챙기고, 하던 일도 그대로 벌여 놓은 체로 가버려요. 사장이 다 치워야 해요." 그런데 최씨는 6시가 넘어도 사장이 "최씨, 그만갑시다!할 때까지 소리 없이 일한다, 지극 정성으로! 


우리집이 워낙 오래된 건물(1964년 준공)이라 나이든 노인들 삭신 쑤시듯 어디 성한 곳이 없다. 울 오빠 말로는 "확 밀어 뻐리고 새로 져!" 하지만 우리 만도 46년을 살며 고치고 손질하며 달래서 살아온 집이라 구석구석 정이 고여 어느 한 곳도 털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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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런 심정과 사정을 잘 아는 사람만이 이 집을 손 댈 자격이 있다. 차사장이 처음 대대적으로 우리집을 고칠 땐, 2층으로 올라오는 내부층계를 새로 하며 헌 것은 뜯어다 3층 다락방 오르는 층계로 썼다. 부엌 싱크대는 다락 층계 옆 중간중간에 배치하여 수납장으로 사용하게 했다


일본에서 집수리를 배워 집안 어느 한 구석도 허투로 버리지 않고 활용하는 그 마음씨에 우리도 마음을 그에게 다 내주고 집수리를 시키곤 했다. 오늘도 늦도록 바람벽이고 뒤꼍이고 구멍난 곳을 일일이 찾아 '땜빵'하고 다니는 그를 보면 꼭 자기 집 고치는 주인 맘씨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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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우리집 인터넷을 수리하러 SKT-브로드 기사가 왔다. 도배를 하느라 도배사가 선을 잘못 당기는 바람에 광섬유가 떨어져 나가 기사가 작업을 해야 한단다. 젊은이는 우리 두 노인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주고 갔다.


일꾼들이 돌아가고 나니까 우리 둘의 작업시간. 보스코는 이층서재 도배 땜에 모든 걸 꺼냈다가 모든 걸 제자리 찾아 정리를 한다. 나는 도배 담당이 마루 바닥에 끈적끈적 붙여 놓은 풀 자국을 걸레로 몇 번이나 닦아낸다. 둘이 함께 하니 이런 일도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으며 하느라 힘든 줄을 모른다. 늙어갈수록 서로의 존재에 대한 고마움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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