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8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날씨는 맑고 모처럼 바람 없는 오후였다. 지난 번 산보하러 나섰다 잉구네 논이 있는 골짜기로 바람이 내리 불고 빗방울이 지기 시작해 돌아서야 했던 억울함에 그길을 다시 걷자고 했다. 그쪽 길 들어서면 30여년전 대전 공심당한의사님이 지어놓은 널따란 별장이 보인다. 일년 중 여름에 몇 번 인기척이 보이곤 했는데, 올 겨울엔 사람이 다녀가는 흔적이 아직 없다. 집이 외로우면 보는 사람들도 속이 빈다


문정리가 자리 잡은 법화산 비탈과 휴천강 건너 와불산 자락에는 군데군데 큼직큼직한 집들이 지어져 있는데, 대개 비어 있다대나무밭이 둘러친 오랜 한옥이든, 전원생활의 꿈을 안고 새로 지은 양옥이든 빈 집은 울타리 없이 마지막으로 그곳을 떠난 사람의 심경이 문간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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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기형도 "빈집"에서)

'돼지막 길'을 내려가다 보면 솔밭 속에  여러 세대가 들어살 수 있는 하얀 별장이 늘 쓸쓸하게 서 있다. 도회지에서 큰돈 벌었겠지만 산골에 새 집 짓고서 늙은 어머니 모셔다 그 큰 집에 혼자 살게 했으니 그 안노인에겐 일종의 유배였을 게다. 일년에 몇 번 어머니 뵙는다며 다녀가다 그 어머니가 세상 버리고 나니 그 집도 함께 버려져 있다. 그 아래아래 별장도 그렇고. 휴천재야 우리가 비우고 떠나도 아들네 수도 가족이 돌아가며 사용해 줄 듯해서 미리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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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 뜸했던 산보길이 우리 둘에게는 묘지 순례이기도 하다. 유영감 부부, 검은굴댁네 이영감, 허영감네 아줌마 묘를 차례로 지나며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주모경'을 바치고 새해 인사를 드렸다. 아래숯꾸지 건너편 옥구 영감이나 강건너 산비탈 부면장 부부에게는 멀리서 눈인사(+ 주모경)로 대신했다. 우리가 휴천재에 정착한(2007년) 이후 세상을 떠난 노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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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점심을 먹고 산보를 가기로 나섰는데 보스코가 배밭에 들어가 두 달 전 전지한 가지들을 거두고 있다. 나도 낫을 들고 배나무 밑으로 들어서서 배나무 한 그루마다 퇴비 한 포씩 끌어다 놓았다. 보스코는 휴천재 정자에 걸어 말린 시레기도 거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귀한 국거리다. 우리도 어제 점심에는 들깨 갈아넣은 시레기국에 밥 말아 한 그릇씩 비웠다. 어려서 너무 가난하여 겨울이면 시레기죽 밖에 먹을 게 없었다는 보스코에겐 시레기국은 엄마의 체취로 이어지는 입맛의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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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의 복음단상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136

오늘 주일에는 새해 '은빛나래단' 첫 모임을 가졌다. 이달 중순에 남해 형부생신이 있었고, 글피는 보스코의 영명축일이어서 함께 축하하는 자리였다. 일동은 미루네 '팔보효소' 응접실에서 임신부님의 미사에 참례하고, 동의보감촌에 올라가서 점심을 먹었다. 봉재언니는 갈수록 힘들어하는데 요즘 내가 죽으면 못 놀아를 읽으며 그 처지와 심경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노인들은 아이와 같아지므로 무슨 '문제'를 놓고 따질 게 아니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같은 처지에 눈높이를 맞추어 보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아가는 중이다. 그것은 머쟎아 우리 자신의 모습이고 말 못할 우리의 심경일 테니까오늘 만난 남해언니 얘기로는, "85세가 넘으면 '두 발로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 '화장실을 자기 발로 가는 것'만으로도 인생 80점은 된다"는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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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이면 호천이가 전화를 해 온다. 가족들 상태 점검 차원이다. 오빠는 전화를 걸면 한 시간 내내 쉬지 않고 얘기를 한다. 혼자 지내는 사람들의 특이한 행동 같지만, 이 곳 산골에서도 혼자 사는 사람을 만나면 두세 시간 쉬지 않고 얘기를 해온다. 심지어 혼자 있어도 '12역'으로 얘기를 주고받다가 화들짝 놀란다고 실토하기도 한다.


보스코가 저렇게 말수가 적은 건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책상 앞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학문적 대화를 나눌 뿐더러, 평소에 자잘한 얘기를 주고받을 아내가 곁에 있어서겠다. 둘이 함께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 오늘 남해형부가 실토하던 말처럼, "아침에 눈뜨고 아내가 보이면 감사하더라"는 한마디에 수긍이 간다. 평생을 두고 '사랑하네' '미워하네' 사랑싸움을 하다 이제는 배우자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고맙다니 부부애 이상의 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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