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5일 목요일. 흐림


집도 춥고 날씨도 흐려 뼛속까지 으스스 떨린다. 엄마는 한겨울이면 손수 세타를 짜서 입으시고 우리에게도 입히셨고, 엄마의 뜨개질 솜씨로는 올 사이로 찬바람이 쌩쌩 드나드는 세타였지만 "이게 이래 봬도 공작실로 짠 거야!" 자랑하셨다. 지금 우리가 걸치는 오리털 파카라든가 기모 바지 같은 걸 입는 세대로서는 어른들의 '뼛속까지 시리던' 시절을 상상도 못할 게다. 그렇게 떨면서도 늘 잊지 않고 덧붙이시던 말씀이 "뭐니뭐니 해도 바깥 인심이 제일이야!"라는 한 마디. 살아보니 맞는 말씀이다. 겨울이면 햇볕이 휴천재 서재 마루 깊숙이 들어온다. 


[크기변환]IMG_8872.JPG


바람이 불고 날씨는 흐려 을씨년스러워도 낼 모레는 영하로 내려간다는 기상예보에 어제는 드디어 무를 뽑았다. 배추는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 달아지는데, 무는 물이 많아 한 번 얼면 회복이 안 되니 얼기 전에 꼭 뽑아야 한다. 날씨도 춥고 심란하던 차에 드물댁이 올라오고 보스코도 도와준다고 나서니 그래도 마음은 든든했다.


미루와 내가 자잘한 무는 뽑아 섞박지를 담은 터여서 제법 굵은 무들이 남았지만, 굵어본들 구장네 무의 몇분의 일 크기밖에 안 된다. 구장은 '무를 심으면서 복합비료를 줘야 우리 것만큼 큰다'고 하지만 지난 20여 년 간 화학 비료를 전혀 안 준 텃밭이니 앞으로도 그대로 밀고 나갈 참이다. 우리 무는 작지만 달고 결이 단단하면서도 사각사각하여 이듬해 오뉴월까지도 그대로 싱싱하다.


[크기변환]20211124_141643.jpg


[크기변환]20211124_143126.jpg


나더러 두 식구 살면서 무 배추를 많이도 심었다고 구박들 하는데 겨울이 되기 전에 다 소비된다. '무 좀 달라'는 사람들에게는 택배로 보내주고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가져다 먹을 것이다. 무가 뽑혀 나간 이랑 곁에 남은 올해 배추는 여느 해와 달리 병든 몸을 뉠 날을 기다리는 늙은 여자들 같다. 잎은 무름병으로 늘어져 누렇게 떡잎 지고 겉이 멀쩡한 것도, 갈라보면 속이 물클어져 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병들어 시들면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 이치는 같다.


[크기변환]20211125_152751.jpg

보스코는 배나무를 전정하고 무청 시레기를 정자에 널었다

[크기변환]20211126_150105.jpg


'살인마' 또는 '학살자'라는 역사적 이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전두환이 관 속에 들어갔다. 반민족 세력 친일파 박정희의 군사반란을 뒤이어 두 번째로 군사반란을 일으킨 군인이다. 


1979년 빵고가 21일에 태어났던 해 가을! 추석날 밤, 보스코는 서울 우이동집을 둘러싼 떡대같은 여닐곱 안기부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남산으로 끌려갔다. 언덕 너머 '꽃동네'에 살던 찬성이 서방님도 추석을 쇠러 우리집에 와 있다 아침 밥상에서 잡혀간 터였다. '남민전'이라는 조작 사건을 만들어 학생운동을 일망타진하던 안기부가 운동권 학생들과 노조 간부들의 집집마다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과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라는 책이 무슨 필독서마냥 꽂혀 있음을 보고서 안기부는 이 두 서적을 번역 출판한 성염-성찬성 형제가 민주화운동을 선동하는 사상적 원흉으로 보았던가 보다.


(경향신문 11월 24일자 그림마당)

[크기변환]0003112042_001_20211123215402396.jpg


'민가협'도 없었던 시절이니 내 암담함이란 늘 지옥문 앞에 선 심정이었다. 다행히 김재규 안기부장이 한 달 만인 1026일 새벽 보스코와 찬성이 서방님을 남산에서 내보내 주었다. 석방 이틀 전 24일 한밤중에 보스코의 취조실을 순시하던 김재규가 보스코에게 남기고 간 한 마디, "그런 하찮은 운동 따위로 세상이 바뀌겠어?"는 기이한 여운을 남기더란다. 10.26 저녁 박정희가 시바스레갈 병을 끌어안은 채 머리에 김재규의 총을 맞고 저 세상엘 갔다. 저 말 마디가 자기 손으로 독재자를 처단하기로 맘 먹었노라는 '김재규 장군'의 결의를 내비친 것이었을까?


이듬해 5월 어느 날 등장한 살인마가 전두환이었다!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을 마구 도륙하고 쏴 죽인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계엄령 하여서 우린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광주 아닌 대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나라 정치판이 사뭇 달라지지 않았을까? 대한민국이 겪은 군사반란 주동자들이 나온 땅이 아니고 피해자 지역이었더리면 지금처럼 모든 선거에서 대구가 보수세력의 본거지로 드러날까? 


2021년에도 대구 '매일신문'은 현정권의 개혁정책을 자기 지방 출신 군인들이 저지른 5.18학살로 빗댔다. 이 신문은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발행하는 일간지다.

[크기변환]2103221314010400.jpg


5.18 당시 어느 외신기자가 보스코에게 취재와서 인터뷰하면서 "대구 고위성직자가 나에게 '전라도엔 본시 좌익이 많아요. 그자들이 (계엄사가 말하는 그 폭동을) 일으켰을 꺼에요.'라고 하더라"면서 보스코의 멘트를 요청하던 일이 기억난다. 타고난 반골로, 더구나 광주가 고향인 보스코의 울분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http://www.edasan.org/sub03/board03_list.html?scolumn=name&skeyword=%EC%84%B1%EC%97%BC&bid=b32&page=&ptype=view&idx=6683

당시 '서울주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던 보스코는 모든 언론이 침묵할 때에 '광주사태' 소식을 서울주보에 실어 알리던 일로 계엄사 합수부의 손길이 다가오자 "잠깐 몸을 숨기라"는 오태순 신부님의 귀뜸으로, 또 (지금은 내 대모이신) 김상옥 수녀님의 배려를 받아 (찬성이 서방님네랑) 두 가족이 오산 수녀원으로 가서 몇 달 숨어 살아야 했다. 수녀님들이 그 몇 달 먹여주고 재워주고 우리 아이들(빵기, 빵고, 꼬끼, 쫍쫍이)과 놀아주셨다. 


그러다 보스코의 울분에 찬 반정부 활동을 우려하던 송기인 신부님이 보스코더러 몇 년 간 로마에 가서 공부나 하고 오라고 주선하셔서 우리 가족은 깡통만 안 찼지 맨 주먹 유랑민으로 로마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됐다.


[크기변환]IMG_8869.JPG